brunch

산초 장아찌

그 짜릿한 삶의 전율

by 마르치아

곶자왈에 삶을 틀어 앉고 사니 도처에 선물들로 넘쳐난다. 그 중 하나는 바로 산초 잎과 열매의 발견이다. 산초 나무들의 이파리를 스치면 어디선가 맡았던 독특한 향취가 난다. 식물들도 저마다의 체취로 존재를 알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창조주의 깊이를 느끼곤 한다. 그 귀한 열매들을 따서 모아 장아찌를 담그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산초나무를 찾아낼 때마다 내 마음에서는 폭죽처럼 환호가 터져 나왔다.





열매를 한웅큼씩 따서 곶자왈 산책 내내 들고 다니다가 숨을 들이키며 향기를 맡노라면 이 힐링은 해보지 않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값진 경험이다. 향을 들여마시는 순간마다 오래 묵은 그림자들이 조금씩 옅어졌다. 굳어 있던 어깨가 느슨해지고 세상과 맞부딪히며 쌓였던 긴장들이 서서히 풀려나갔다. 산초는 말없이 나를 안아주는 스승 같았고 작은 열매들은 곶자왈의 숨결을 품은 채 내게 삶의 온도를 다시 알려주었다.




숲 전체가 내 코를 통해 폐부로 들어오는 그 느낌을 무엇이라 표현하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시 배우는 순간이었다. 숨 하나가 이렇게 많은 것을 데리고 들어올 수 있다니 곶자왈은 나를 천천히 흔들어 깨웠다. 향이 가슴 깊이 눌러앉으면 오래전에 잃어버린 내 본래의 얼굴이 잠시 모습을 드러내고 나는 그 얼굴을 알아보려 조용히 마음을 기울였다. 삶이 내 안쪽을 두드리며 여기 있다고 속삭이는 듯한 떨림이었다.




나는 귀한 식재료를 발견하면 어디에든 쟁여두는 버릇이 있다. 산초도 예외가 아니다. 이 산초를 맛보여 줄 사람들이 갑자기 빨랫줄에 걸린 빨래처럼 주르륵 스쳐 지나간다. 그 얼굴들은 하나하나 마른 햇빛 냄새가 배어 있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인연들이었다. 어떤 이는 곶자왈의 짙은 그림자를 떠올리게 했고 어떤 이는 산초 알갱이처럼 톡 쏘는 기억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안쪽에 작은 그릇 하나를 꺼내 놓는 기분이 들었다. 그릇마다 담아줄 향과 간직해줄 온도가 달랐다. 산초를 만지며 떠오른 얼굴들은 결국 내 인생의 시간들이었고 내가 사랑했던 순간들이었다.




맛보여 주리라는 기쁨이 얼굴에 환하게 피어 올라 입꼬리도 승천한 채 카페로 들어선다. 손안의 산초 열매들은 작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누구에게 먼저 건넬까 생각하는 동안 마음 한쪽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문을 밀고 들어오는 바람과 함께 산초의 숨결이 카페 안에 퍼졌다. 이 작은 열매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환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 가슴 안쪽에 조용한 설렘이 번졌다.




싱크대 양은 그릇에 물을 받고 열매를 담근다. 손에 남은 산초 향기를 조금이라도 더 맡고 싶은 마음에 두 손을 코끝에 대고 다시 심호흡을 한다. 그 순간 나는 숲의 한가운데로 돌아간 사람처럼 느껴졌다. 손끝에서 코끝까지 스며드는 향은 곶자왈의 숨이었고 그 숨이 내 안으로 들어올 때 오래 묵은 피로들이 물속의 먼지처럼 가라앉았다. 두 손을 내리면서도 아쉬움에 다시 손바닥을 코끝에 가져가 향을 붙들었다. 오늘의 향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삶이 내게 건네준 작은 계시를 놓치기 싫은 사람처럼.




아로마 테라피가 따로 있나. 이것이 바로 자연의 아로마 테라피였다. 숲의 바람과 햇살과 흙의 온도가 한데 섞여 폐부까지 들어오는 순간 나는 향기를 잊고 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의 마음을 살리는 향은 결국 가까이에 있었다. 숲이 내 손에 잠시 맡겨준 이 작은 열매들이 오늘 하루를 다시 살게 하는 숨이었다.

이 산초향이 내 뒤틀린 감정의 찌꺼기를 몰아내는 정화의 향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며 절로 까치발이 되었다. 마음의 무게가 잠시 들려지는 듯했고 오래 눌러 있던 감정들의 잔해들이 산초향을 따라 밖으로 빠져나갔다. 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내 안에 서성이는 슬픔과 불안을 알아채고 자리 하나 마련해 내보내 주는 듯했다. 그 배웅이 고마워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다.





물에 맑게 헹궈진 산초 열매들. 왜 산에 가면 열매들이 유독 눈에 잘 띄는지 모르겠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어둠 속에서도 작은 열매들은 스스로 빛을 낸다. 마음이 먼저 알아보는 것처럼 시선이 저절로 가서 꽂힌다. 욕망이 먼 곳에서 흔들어도 숲은 조용히 말한다. 여기 있다고. 내가 흘려보낸 마음들이 열매 하나에 다시 모이는 것 같았다.





내 삶에서 내가 욕망하던 열매들을 보면 어느새 그 열매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껴온 것이 아닌가 한다. 손에 닿지 않는 자리에서 빛나던 것들. 내가 갖고 싶어 애쓰던 순간들. 그 모든 열망이 숲의 열매 하나를 통해 나를 조용히 돌아보게 했다. 바라보는 순간의 충만함이 쥐려는 욕망보다 더 깊을 수 있다는 것을 산초 열매들이 가르쳐주었다. 숲은 그 작은 열매를 통해 내게 말했다. 너는 이미 충분하다고.




아주 맛있어서 흰 밥에 물을 말아 먹던 간장 고추 장아찌와 합체했다. 간장의 짠 향과 산초의 떨림이 한 숟가락에 스며드는 순간 오래된 나의 입맛과 숲의 향이 손을 맞잡는 기분이 들었다. 전혀 다른 두 결이 만나 이상할 만큼 잘 어울릴 때가 있듯 이 장아찌들도 서로의 온도를 나누며 더 깊은 맛을 만들었다. 인연도 그렇다. 스쳐 지나간 조각들이 시간이 흐른 뒤 하나의 의미가 되어 돌아오는 것처럼.




장아찌가 익는 날 나는 결코 뚜껑을 열지 못한다. 이 귀한 산초 장아찌를 맛보여 줄 그대가 아직 닿지 않았으므로. 뚜껑을 여는 일은 마음을 여는 일과 닮아 있다. 서두르면 안 된다. 향은 기다림 속에서 깊어진다. 그대의 발걸음도 언젠가 이 향처럼 나에게 왔으면 하는 바람이 병의 뚜껑 위에 얹혀 있었다. 나는 그 믿음 하나로 병을 살짝 매만진다. 아직은 열지 않아야 하는 때. 익어가는 소리만 조용히 듣는 때. 내 마음도 그 시간 속에서 천천히 숙성되고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장아찌 병을 쓰다듬는다. 그 병은 조용한 안부였다. 오늘도 잘 익어간다고 손바닥에 온기를 남기며 전해주는 듯했다. 그대에게 닿을 날을 기다리는 이 장아찌가 내 마음까지 대신 익혀주는 것 같았다. 조금 더 따뜻하게. 조금 더 단단하게. 조금 더 향 깊은 사람으로.



가끔은 장아찌가 익어가는 그 시간을 바라보며 내가 누군가에게 한 번쯤 건넸던 작은 마음들을 떠올리게 된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전해졌으면 했던 따뜻함. 괜히 손끝에 오래 남았던 관심. 아무렇지 않은 척 건넸던 음식들. 그때의 나는 그저 하루를 살아냈을 뿐인데 돌아보면 그것이 누군가를 향해 아주 조용히 내민 손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익어가는 산초의 향을 맡으면 그 조용한 손짓이 다시 떠오른다. 기다림과 정성은 언제나 말없이 쌓이는 것이니까. 산초 장아찌 뚜껑은 과연 언제 열릴 수 있을까.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