솥밥의 계절이 왔다. 왠지 아날로그로 돌아가고 싶은 날들이 있다. 겨울은 무의 계절이니 무를 베이스로 채를 썰어 넣고 달래를 쫑쫑 썰어 옆에 쪼로록 담았다. 짭짤한 맛이 부족해 단무지를 다져 넣고 감칠맛을 위해 명란을 한 수저 얹었다. 마지막엔 들기름을 둘렀다. 하지만 솥밥을 짓는 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쌀을 씻어두는 일이다. 전분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말갛게 헹궈 체에 받쳐두고 그 물기를 빼며 15분을 기다린다. 그 기다림이 솥밥의 첫 번째 불맛이다. 밥이 되기 전의 쌀은 마치 사람의 마음 같다. 충분히 씻기고 잠시 쉬어야 제 온도를 되찾는다.
뚝배기 솥에 쌀을 얹고 다시마 세 조각을 올린다. 그 위에 쯔유를 한 바퀴 돌리면 검은 실처럼 퍼진 간장이 쌀알 사이를 스며든다. 물이 끓기 전까지는 고요하다. 손끝으로 불의 세기를 조절하며 나는 내 마음의 온도를 맞춘다. 솥이 들썩이기 시작하면 마음도 덩달아 들썩인다. 삶의 어느 국면도 그렇듯 솥밥은 공식이 아니라 감으로 완성된다.
중강불로 먼저 쌀을 끓여야 한다. 센불로 끓이면 안 된다. 불이 너무 세면 밥은 숨을 곳을 잃는다. 조금 들썩일 만큼의 불, 그게 밥이 익어가는 리듬이다. 쌀은 서서히 부풀고 물은 그 숨결을 품으며 사라진다. 인생도 그렇다. 급히 데우면 타버리고 천천히 끓이면 향이 난다.
솥밥은 뜸 들이기가 밥의 8할이다. 불을 끄고 난 뒤 그 묵직한 뚜껑 아래서 밥은 마지막 숨을 고른다. 삶도 마찬가지다. 다 된 줄 알고 서둘러 뚜껑을 열면 되던 일도 되지 않는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스스로 익을 일을 조급한 마음이 그 향을 망가뜨린다. 세상 모든 일에는 뜸이 필요하다. 사랑도 사람도 꿈도. 그 기다림의 시간 안에서야 비로소 제 맛과 향을 낸다.
뜸이 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양념장을 만든다. 간장에 참기름 한 숟갈 다진 마늘과 깨소금 그리고 달래를 조금 더 썰어 넣는다. 숟가락으로 휘휘 저을 때 나는 고소한 냄새가 기다림의 허기를 달랜다. 솥이 잠잠해지고 김이 천천히 가라앉을 때쯤이면 양념장의 향이 방 안에 은근히 퍼진다.
설컹하게 익은 무와 짭조름한 단무지 그리고 명란을 섞어 밥을 푼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솥밥에 양념장을 두르는 순간 들기름의 향이 얇게 번져 공기가 달라진다. 밥알 하나하나가 제 자리를 찾아 윤이 돌고 숟가락이 그 사이를 부드럽게 헤집는다. 김 사이로 빛이 비쳐 들 때 그건 밥이 아니라 하나의 풍경이다.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으면 명란의 짠맛이 먼저 혀끝을 두드리고 그 뒤를 따라 무의 단맛과 달래의 향이 천천히 번진다. 뜨거움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마음 깊은 곳까지 닿는다. 그 순간 하루의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린다.
솥밥 한 그릇 안에 계절이 있다. 불의 기억 기다림의 시간 그리고 나의 숨결.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조급함을 덜고 천천히 익히며 향이 날 때까지 기다리는 일. 오늘의 밥은 그렇게 나를 다시 사람으로 익혀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