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세상이 너무 무겁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가슴을 베어 갈라놓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쌀을 씻어 물을 붓고 밥을 눌리는 일뿐이었다. 누릉지를 곰탕처럼 폭폭 끓여 국물까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시는 날에는 몸살도 향수병도 지독한 외로움도 조금씩 지워졌다. 뜨거운 냄비 안에서 밥알이 서로에게 기대다가 타닥타닥 터지는 소리를 들을 때면 이상하게도 내 마음 깊은 데서 오래된 울음이 잠깐 멈추었다. 그건 마치 삶이 내게 속삭이는 작은 신호 같았다. 아직 완전히 부서진 건 아니라고 아직 숨은 남아 있다고.
뜨거움을 견디는 밥알을 보며 나는 어느새 그 밥알이 되어 함께 이를 악 물고 버티고 있었다. 상처받은 사람의 아픔이 밥알이 타는 냄새와 함께 내 몸에 스며들었다.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그냥 같이 앓아주겠다는 마음이었다. 밥알 하나의 생이 누군가의 상처를 닦아내는 데 쓰인다면 나는 그걸 기꺼이 견디고 싶었다. 삶의 많은 순간이 그렇듯 뜨거움 끝에 오는 노릇한 황금빛처럼 상처도 언젠가 향기가 되겠지 하는 희미한 믿음 때문이었다.
누군가 내 위로가 필요한 날이면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밥부터 눌리게 되었다. 사람마다 사는 무게가 다르고 그 무게의 결이 다르다는 걸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말보다 먼저 밥을 눌렀다.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의 정확한 모양을 물어본 적이 없다. 왜 슬퍼하느냐고 왜 지쳐 있느냐고 되묻지 않았다. 대신 누릉지를 끓여서 차려주고 등 한 번 조용히 쓰다듬었다. 그 한 번의 손바닥에 담긴 의미는 설명으로는 도저히 다 닿지 못할 만큼 크고 말로 부연할수록 시들해지는 종류의 진심이었다.
누릉지가 먹기 좋게 식어가는 동안 따뜻해진 손으로 상처받은 등을 도닥였다. 사람의 등에는 그 사람이 지나온 길의 그림자가 붙어 있어서 등을 어루만지는 일은 곧 그 사람의 세월을 만지는 일이기도 했다. 뜨끈한 냄비가 천천히 식듯 마음도 그렇게 식기를 바랐다. 나는 그 과정 전체가 기도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의 젖은 마음을 내 손바닥에 잠시 담아두는 일. 다만 잠시라도 그 무게를 덜어주는 일. 그렇게 조금씩 다시 살아나는 기척을 느끼는 일.
누릉지를 끓일 때 나는 타닥거리는 소리 속에서 세상의 모든 울음을 들었다. 말로는 다 하지 못한 마음. 해명해도 닿지 않는 억울함. 쉬어갈 틈 없이 흘러간 계절들의 쓸쓸함. 어쩌면 사람은 원래 누군가의 따뜻한 밥 한 숟가락에서 다시 일어서는지도 모른다. 오래 끓여 낸 국물 한 모금에 살아날 힘이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위로란 거창한 말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그마한 쌀 한 톨에서도 태어난다는 사실을 나는 이 누릉지 앞에서 매번 깨닫는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고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묻지만 나는 오히려 묻고 싶다. 상처난 사람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위로는 지시가 아니라 몸으로 빚는 것이라고. 서로의 삶을 끓여내는 시간들이 우리를 사람 되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그걸 누릉지를 끓이며 배웠다. 아무 조건도 이유도 필요 없이 그 자리에서 불을 켜고 물을 붓고 삶아내는 일. 그게 내가 아는 가장 오래된 위로의 방식이다.
삶은 늘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고 고통도 분명한 이유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누릉지처럼 천천히 응답하는 법을 배웠다. 말보다 느리게 움직이고 판단보다 먼저 체온을 건네고 조언보다 먼저 국물을 끓여내는 방식으로.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타닥타닥 터지는 소리 사이로 작은 웃음이 끼어들기도 했다. 그 웃음은 늘 뜨거운 여름밤의 첫 바람처럼 살짝 지나가지만 마음에는 오래 남았다. 그 순간을 위해 나는 계속 밥을 눌리고 누릉지를 끓였다.
누릉지는 타는 냄새와 구수한 향 사이 어딘가에서 사람을 살려낸다. 그 뜨거움과 황금빛 사이에 삶의 비밀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모두 각자 타닥거리며 지나온 세월이 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누룽지가 되기도 한다. 너무 오래 태워 먹어 쓸어 담기 힘든 잿더미가 되는 날도 있었고, 잘 눌어붙어 향기가 깊은 날도 있었다. 어떤 날들은 손에 잡히지 않는 가루처럼 흩어졌고 또 어떤 날들은 선명한 결로 남아 나를 지탱했다.
누군가의 상처가 깊어 보이면 나는 더 천천히 불을 줄였다. 삶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건 더 세게 끓이라는 것이 아니라 더 오래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기다림 속에서 국물은 깊어지고 마음도 비로소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 기다림을 사랑했다.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는 건 결국 그 사람의 시간을 함께 기다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누릉지의 국물이 바닥나고 나면 이상하게도 세상은 조금 덜 아프게 보였다. 아픔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국물이 사라지는 그 마지막 순간에 나는 내 안에서도 어떤 부분이 정화되는 것을 느꼈다. 오래 묵혀둔 슬픔이 연기처럼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위로가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말 대신 조용히 밥을 눌릴 것이다. 그게 내가 배운 사랑이자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깊은 이해의 방식이었다.
누릉지는 늘 나보다 먼저 사람을 안아주었다. 나는 그저 그 옆에서 불을 조절하고 냄비를 들어 국물을 따라 주고 등을 도닥였을 뿐이다. 그렇게 오래 반복된 작은 의식 속에서 나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게 되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누릉지를 더 좋아했다. 뜨거움 속에 묻어둔 이야기가 있었고 노릇한 결 사이에 오래된 울음이 숨어 있었다. 나는 그걸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건 내 역할이었고 내 기도였으며 내가 살아가야 할 방식이기도 했다.
누릉지의 맛은 단순했지만 위로는 복잡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 있어주는 것. 불을 너무 세게 하지 않는 것. 국물이 흘러 넘치지 않도록 가만히 지켜보는 것. 뜨거움이 조금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 그 모든 과정이 있었기에 나는 매번 누군가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이 잠시 앉아 쉴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등을 바라본다. 어깨가 무너진 채 앉아 있는 사람. 말하지 않아도 울고 있는 사람. 이유를 듣지 않아도 마음이 덜컥 내려앉은 사람. 나는 그 옆에서 밥을 씻고 눌리고 끓이고 국물이 우러나는 시간만큼 그의 아픔도 조금은 옅어지기를 바란다. 누릉지가 노릇해지는 동안 우리는 모두 조금씩 살아난다. 삶은 그렇게 나를 위로했고 나는 그렇게 또 다른 누군가를 위로했다.
나는 이제 안다. 누릉지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을 다시 세우는 오래된 방식이라는 것을. 흐트러진 영혼을 조용히 조립하는 뜨거운 빛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빛을 건네는 일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아마 계속 이어질 것이다. 타닥거리는 작은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상처가 조금은 덜 아프게 되기를 바라며 나는 오늘도 냄비를 올린다. 이것이 내가 가진 사랑의 가장 깊은 언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