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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국물은 오래 끓여야 맛이 났다

by 마르치아


삶이란 국물처럼 금세 맛이 우러나지 않는다. 뜨겁게 끓어오를 때는 숨이 가빠지고 밑바닥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오는 미세한 기포들 그 조그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시간에 비로소 진짜 맛이 스며든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젊은 날의 내 삶은 센 불에 올린 냄비 같았다. 사람 관계도 그렇고 꿈도 그렇고 모든 것을 단숨에 우려내고 싶어 불을 올리고 뚜껑을 덮었다가 조급함에 다시 들추어보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국물은 겉만 끓어오르고 속은 아직 차가웠다. 맛은 깊어지지 않았고 내 마음은 늘 바닥에 눌러붙어 있었다.


끓어오르는 삶의 소리가 그때는 음악인 줄 알았다. 치익 치익 물이 넘치려는 순간의 날카로운 비명 문틈을 타고 스며드는 뜨거운 집김 고개를 들었을 때 이마에 맺히는 발한 그 모든 것이 젊음의 전부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건 미성숙한 열기였고 익지 않는 분노였다.


삶이 내게 말한 건 늘 나중이었다. 벌컥부대며 살다 문득 멈춰선 날 어둠 속에서 국물 끓는 소리를 들었다. 불을 아주 약하게 줄인 시간의 냄비 바닥에서 작은 기포 하나가 뿜어 올리는 그 소리는 너무 조용해서 귀를 가까이 대야 들렸다. 타닥 또 타닥 마치 오래전에 죽은 할머니가 장독대 앞에서 뚝배기를 눌러앉히며 아직 멀었다게 좀 더 둬야 맛이 난다 하고 말하던 그 음성처럼.


그때 나는 깨달았다. 삶도 그렇게 익는 거라고. 센 불로는 절대 우러나지 않는 맛이 있다고. 상처도 분노도 억울함도 시간이라는 약불 아래에서 조용히 다져질 때 비로소 내 삶의 바탕이 된다는 것을.


무엇보다 국물의 깊이는 바닥에서 오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 타들어가는 순간까지 버티며 남아 있는 기운 그게 진한 맛을 만든다. 내 삶도 그랬다. 겉으로 보이는 날들보다 아무도 몰랐던 서러운 날들 말하지 못한 상처 바람에 젖어 혼자 울던 밤들이 오히려 나를 깊게 만들었다.


국물이 진해지는 순간은 늘 예고 없이 왔다. 재료들이 서로의 향을 포개고 마음의 온도가 바닥에서 은근하게 올라오고 끓는 소리가 깊어서 이제는 마치 바다 속에서 들리는 파도음 같았다. 그 소리와 함께 나는 알았다. 아 이제 국물이 되었구나. 이제 내가 나라는 맛을 갖기 시작했구나.


삶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늘 나에게 말했다. 너무 조급하다 너무 뜨겁다 너무 많이 준다 너무 쉽게 상처받는다. 그런 말들에 마음이 쑤셔오는 날엔 불을 잠시 내리고 싶었지만 나는 그때마다 더 끓어올랐다. 그러다 결국 내 안의 국물이 넘쳐 바닥을 적시고 관계는 타들고 마음은 눌어붙었다.


그러나 그 모든 실패가 지금의 깊은 맛을 만들었다. 나는 아프고 나서야 배웠다. 삶의 센 불은 나를 소모하고 약한 불은 나를 지탱해준다는 것을. 심장이 너무 뜨겁게 뛰던 시절보다 지금의 잔잔한 심장 박동이 더 신성하다는 것을. 끓는 소리보다 구수하게 익어가는 향이 더 오래 간다는 것을.


국물은 오래 끓여야 제맛이 난다. 그 말이 이제 내 인생의 문장이다. 불안도 견뎌야 하고 서러움도 견뎌야 하고 사람을 잃는 경험도 이해받지 못한 날들도 모두 나를 깊게 우려낸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수많은 밤을 끓여낸 국물 같은 사람이다. 쉽게 흐려지지 않고 쉽게 밍밍해지지 않고 한 번 스며든 맛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나는 안다. 마음이 탁해지는 날에는 불을 잠시 내려야 한다는 것. 사람이 너무 뜨겁게 굴면 스스로를 태워먹는다는 것. 말을 줄이고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향을 하나 피워 올리며 내 안의 서늘한 구석까지 따뜻하게 데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의 약불이다.


지금의 나는 삶을 먹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서러움도 한 숟가락 기쁨도 한 숟가락 억울함도 찔끔 사랑은 조금 더 크게. 그렇게 모든 것을 휘저어도 국물이 탁해지지 않는 이유는 내가 더 이상 불을 세게 올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삶을 천천히 끓이는 사람이다.


내 삶의 국물은 오래 끓여야 진해졌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나를 천천히 우려내는 중이다. 누군가의 생도 그렇지 않을까. 쉽게 끓고 쉽게 식고 쉽게 넘치는 사람보다 천천히 익고 천천히 향을 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결국 다른 이의 삶에 깊게 스며든다.


삶은 결국 국물 한 그릇의 시간이다. 대단한 것 같지만 가만히 보면 불 조절의 예술이다. 누구는 너무 뜨겁게 살고 누구는 너무 식게 살고 나는 이제 안다. 사람도 관계도 사랑도 모두 약불이어야 오래 간다는 것을.


그러니 나는 오늘도 조용히 나를 끓인다. 마음이 넘치지 않도록 작은 서운함 하나까지도 허투루 태우지 않도록. 하루의 바닥에서부터 은근하게 올라오는 기포를 들으며 나는 다시 다짐한다. 내 삶의 국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익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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