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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레기 푹푹 삶는 아침

by 마르치아

첨벙. 여름내내 꼿꼿했던 몸이 뜨거운 물에 덜컥 담궈진다. 이것은 폭력인가.



나는 젊을 때 시레기를 먹지 않았다. 그것은 시레기를 무시해서도 좋아하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뜨거운 물을 견딘 채 축 늘어진 시레기가 꼭 나 같았던 날, 나는 국물 속에서 시레기를 건져 먹지 못했다. 시레기가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그 질긴 잎사귀 하나가 내 삶과 부딪혔다. 시레기의 질김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날들의 질김이 목구멍에 걸렸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도, 내가 넘지 못한 벽도, 누구의 말 한마디도 삼키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시레기를 멀리했다. 질기고 축 늘어진 그것이 너무 나 같아서 무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십이 넘자 나는 스스로 시레기를 찾기 시작했다. 마치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오르듯이 나는 어느 날 내 상처에 닿았다가 다시 떠오르는 순간을 맞았다. 그것은 강원도의 어느 시레기 덕장에서 찾아왔다. 줄줄이 걸린 시레기들이 바람에 젖어 흔들렸다. 그 풍경을 보는 순간 나는 문득 멈춰섰다.



나는 시레기의 품위를 낮추어왔다. 그 질긴 결을 약함으로 오해했고 그 축 늘어진 몸을 무기력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오해가 눈앞에서 풀렸다. 여태 삼키지 못한 시레기들이 목구멍 깊은 곳에서 꾸역꾸역 넘어오는 기묘한 감각이 밀려왔다. 그것은 시레기가 아니라 오래 묵은 나 자신의 상처였다.



그때다. 나는 시레기를 먹어보자고 처음으로 결심했다. 이것은 얹힌 무엇을 억지로 넘기려는 일이 아니라 마침내 그것을 삼킬 힘이 생겼다는 신호였다. 그 이후로 나는 이상한 습관 하나를 갖게 되었다. 내가 질겨지거나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질 때 고집의 돌덩이가 될 때 사람의 말조차 들어오지 않을 때 일부러 시레기를 삶아 먹는 것이다. 질긴 것을 먹어야 질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뜨거운 국물 속에서 시레기의 결이 천천히 풀릴 때 내 마음도 따라 풀렸다.




시레기는 원래 부드러운 채소가 아니다. 심지를 품은 잎은 바람에도 눕지 않고 눈보라에도 부러지지 않는다. 한 번 말라 굳은 결은 뜨거운 물에서도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 질김은 누군가의 인생처럼 오래 버티고 오래 묵어야만 드러나는 깊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런 질긴 것들에 경외를 품기 시작했다. 어릴 적에는 버거워 외면했던 것들이 나이가 들자 오히려 내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기도가 되었다. 삶이란 결국 오래 말리는 과정이었다. 햇빛 아래에서 마르고 그늘에서 조용히 식고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떨어지지 않고 버티는 시간들. 그 모든 과정이 지나야 비로소 맛이 생겼다.




부드럽기만 한 마음에는 오래 남는 향이 없다. 질기게 버틴 흔적이 있어야 마음의 맛이 깊어진다. 나는 시레기를 삶으며 종종 생각했다. 인간의 상처도 이렇게 오래 삶아야 비로소 풀리는 것일까. 모난 말과 부정한 인연과 복잡한 감정들도 뜨거운 물 속에서 천천히 풀려야 비로소 넘길 수 있는 것일까.

상처란 넘기지 못하는 것이지 넘기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걸 부끄러움으로 착각했다. 사실은 아직 삶아지지 않은 마음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알게 되었다. 상처를 바로 넘기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고 부족함도 아니었다. 그저 이제부터 삶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느 날은 사람의 무례 또한 오래 삶아야 겨우 목으로 넘길 수 있었다. 누군가의 말은 너무 쉽게 내 살을 베었고 누군가의 침묵은 너무 쉽게 내 등을 돌렸다. 말의 칼날은 금방 지나가지만 무례함의 질김은 오래 남았다. 아직 삶아지지 않은 감정은 아무리 넘기려 해도 목구멍에서 걸려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묻곤 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릴까. 왜 어떤 말은 삶아도 삶아도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그때서야 조금 알게 되었다. 상대의 무례함 또한 그만의 시레기였다는 것을. 덜 삶아진 마음에서 나온 말은 늘 덜 익은 맛을 내는 법이었다.



누군가의 외면도, 갑작스러운 침묵도, 이유 없는 태도도 결국은 그 사람이 버틴 생의 질김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 또한 그랬다. 마음이 바짝 말라 부드러움이 바닥난 날, 나는 타인에게 부드럽지 못했고 말의 여백조차 갖지 못했다. 그날의 나는 나의 시레기였다.



사람의 무례를 넘긴다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 요리였다. 오래 끓이고 오래 기다리고 마음의 불을 줄였다가 다시 올리며 자기 마음을 맛있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사실 나를 다루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시레기를 삶아내는 오늘로 돌아오면 나는 다시 부엌에 선다. 아무도 보지 않는 조용한 시간, 찬장 깊숙이 넣어둔 시레기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본다. 말라붙은 잎사귀는 여전히 질기고 거무스름하지만 그 속에는 오래 버틴 생의 결이 담겨 있다. 나는 그것을 뜨거운 물에 천천히 넣는다. 김이 피어오르고 그 김 사이로 오래된 상처들이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을 살짝 저을 때마다 잎은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지난 시간들이 내 안에서 다른 모양으로 익어간다. 국물이 우러나는 냄새 속에서 오늘의 나를 다시 생각한다. 누가 내게 무례했는지 어떤 말이 걸렸는지 왜 마음이 질겨졌는지 그 모든 것이 뜨거운 증기 속에서 조용히 흩어진다.



나는 젊을 때 시레기를 먹지 못했다. 질기고 축 늘어진 그것이 꼭 나 같아서 두려웠다. 그런데 이제는 시레기가 꼭 나를 닮아서 고맙다. 버티고 말리고 견디고 다시 삶아져 부드러워지는 그 과정이 결국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을 시레기가 먼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시레기를 삶는다. 내 안의 질김 하나를 더 풀기 위해. 넘기지 못했던 감정 하나를 더 부드럽게 하기 위해. 어제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사람이 되기 위해.

그리고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더 깊어질 것이다. 시레기는 언제나 그렇게 말해준다. 질긴 것일수록 오래 버티면 맛이 된다고. 내 삶도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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