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이었다. 엄마가 외출했다 집에 올 시각까지 나는 할아버지와 글쓰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엄마가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도 오지 않는다며 나보고 머리를 긁어 보라 하셨다. 내가 머리 정수리를 긁으면 엄마가 집에 올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이고, 만약 정수리에서 벗어나 옆을 긁으면 엄마가 오다가 다른 곳에 들른다는, 일종의 조짐을 알아내시는 할아버지만의 징크스였다.
나는 그날 머리를 긁어 보라고 하시는 순간 갑자기 귀 뒤가 간지러워서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로 긁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눈을 크게 뜨시면서 “아이쿠, 에미가 딴 데로 샜구나. 우리 경화가 거길 긁는 걸 보니.” 하셨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굳이 엄마가 전화를 하지 않으시면 집에 남은 할아버지와 나는 이렇게 엄마가 오는 시각을 맞추면서 놀았다. 기다림은 불안이 아니라 놀이였고, 맞고 틀림이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파트라슈랑 소년이 앞표지로 나오는 국어 공책을 젖혀 주시면서 “우리 경화, 여기다 글 써 보자.” 하시고는 연필을 내 손에 쥐어 주셨다. “자, 연필은 이렇게 쥐는 거란다.” 나는 서툰 손으로 연필을 쥐면서 “할아버지, 이렇게?” 하고 말똥말똥 눈만 껌벅였다. 할아버지는 공책을 다시 손바닥으로 쫘악 펴시곤 “경화야, 자 봐봐. 글자를 쓸 땐 바른 마음으로 써야 삐뚤어지지 않는다. 알겠지?” 하고 말씀하셨다.
어른이 되어 보니, 그것은 글자를 쓸 때만의 자세가 아니었다. 언어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말씀이었고, 내가 쓰는 단어와 문장에 대해 일종의 책임을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곧은 마음으로 글을 쓰라시던 할아버지. 머리를 긁어도 오지 않았던 엄마가 그리운 오전이다.
글을 쓰다 보면 많은 글을 읽게 된다. 그중에는 문장이 아무리 매끄러워도 마음이 닿지 않는 글이 있고, 서툴러도 오래 머무는 글이 있다. 나는 점점 그 차이가 기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언어를 다루는 태도, 말 앞에서 스스로를 얼마나 단정하게 세우는가의 문제였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말하던 바른 마음이라는 것은 이제 작가에게 주어진 윤리로 다가온다. 어떤 단어를 선택할 것인가, 어떤 문장을 남길 것인가는 단지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였다. 말은 한 번 세상에 놓이면 되돌릴 수 없고, 문장은 누군가의 하루를 건너가 마음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문장은 정직한가, 이 말은 누군가를 함부로 다치게 하지 않는가. 잘 쓰는 것보다 곧게 쓰는 일이 먼저라는 사실을, 나는 오래전 공책을 쫘악 펴 주던 할아버지의 손에서 배웠다.
그래서 나는 어떤 작가로 시작하려 한다기보다, 어떤 태도로 글 앞에 서 있을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세상을 재단하는 말보다 한 번 더 살피는 문장을 쓰는 사람, 빠르게 판단하기보다 잠시 멈춰 문장의 무게를 가늠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누군가의 삶을 빌려 쓰지 않고, 상처를 소비하지 않으며, 말의 힘을 과신하지 않는 작가. 잘 보이기 위해 쓰기보다 오래 견디기 위해 쓰는 글, 그 곧은 마음을 잃지 않는 쪽으로 나는 조용히 시작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