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慈悲)에대하여

by 마르치아


자비는 나를 가르친 가장 조용한 스승이었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나는 자비를 거절한 적도 있었고, 자비를 흉내 내 본 적도 있었으며, 자비를 통해 구원받은 기억도 있다. 돌이켜보면 자비는 거창한 이름의 종교적 미덕이라기보다는, 아주 작은 몸짓으로 스며드는 고요한 손길이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자(慈)"와 "비(悲)"로 나뉜다. 자는 즐거움을 주는 사랑이고, 비는 괴로움을 덜어주는 슬픔이다. 사랑과 슬픔이 동시에 존재하는 마음이라니, 처음엔 이 모순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을 조금 더 살다 보니 알겠다. 진짜 사랑은 함께 슬퍼할 수 있는 용기에서 온다는 것을. 누군가의 아픔 앞에 무력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자비를 배운다.


나는 한 번 크게 아픈 적이 있었다. 몸보다 마음이 더 상했을 때였다. 겉으론 괜찮은 척했지만, 누군가 나를 알아봐주기만 해도 울컥 터질 것 같던 시절. 그때 내게 다가온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내밀었고, 나의 어깨에 손을 얹어주었다. 그것은 조언이 아니었고, 해결책도 아니었지만, 분명히 자비였다. 내가 울기 전에, 이미 그 사람의 마음이 나를 먼저 울고 있었다.


자비는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유를 묻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주는 일. 그게 자비다. 자비는 그렇게 고요하게 타인의 삶에 스며든다. 마치 해가 뜨는 줄도 모르게 방 안을 환하게 물들이는 빛처럼. 자비는 소리 없이 찾아와, 소리 없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나는 자비를 받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동시에, 자비를 건네야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누구나 힘들다. 누구나 자신의 짐을 짊어지고 걷고 있다. 그래서 나는 자주 묻는다. "이 사람에게 지금 필요한 건 조언일까, 아니면 그냥 곁에 있어주는 일일까?" 대부분의 경우, 대답은 후자였다. 사람은 무너지는 순간에, 정답보다 온기를 원한다.


살아가며 내가 배운 자비는 그랬다. 말보다 손, 판단보다 기다림, 이해보다 받아들임. 그것이 자비의 형체였다. 누군가 내게 울고 싶다고 말할 때, 나는 더 이상 "왜?"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여기 있어. 울어도 돼. 난 괜찮아."


자비는 때로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나를 통과한다. 버스 안에서 노인을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의 몸짓, 길에서 주저앉은 개를 위해 발걸음을 멈춘 사람의 눈빛,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을 보고도 모른 척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 우리는 생각보다 자비로운 존재다. 그리고 그 자비는 서로를 살게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누군가의 고통을 마주할 때,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그 사람의 말을 끊지 않고 들어주고, 그 사람의 눈을 끝까지 마주해줄 수 있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의 고통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해도, 함께 아파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자비는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자비는 한 사람의 하루를 바꾼다. 그리고 그 하루가 또 다른 하루를 바꾼다. 그렇게 작은 물결이 파도를 만들고, 그 파도는 언젠가 세상의 기슭을 적신다.


나는 자비로 살아가고 싶다. 말보다 따뜻한 손으로, 정의보다 깊은 이해로, 판단보다 너그러운 시선으로. 누군가 내 곁에 있어준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곁에 있고 싶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인생이 바닥이라 느껴질 때,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나는 여기 있어."


자비는 신의 이름으로 오는 것도 아니고, 진리의 문장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옮겨가는 마음이다. 가장 인간적인, 그래서 가장 숭고한 사랑이다.


오월의 햇살처럼 은은하게, 꽃잎처럼 무게 없이,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오래 남는 것. 그것이 자비다. 그리고 나는, 그 자비를 배우며 오늘도 살아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