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시작은 끝에서야 알 수 있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관계의 경계를 짓는다. 이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지 어디쯤까지 허용할 수 있을지 그림자처럼 마음속에 조용히 선이 그어진다. 하지만 나는 그 선을 너무 빨리 긋지 않으려 한다. 만났을 때의 분위기나 첫인상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이며, 관계란 단 한두 번의 대화로는 결코 본질에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겉모습은 분명 호감을 주었고 말투는 친절했으며 같이 나눈 시간도 분명 나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떠난 후 내 안에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래갈 수 없는 인연이었을 것이다.
나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사람의 진심을 천천히 확인하고 싶다. 말보다 침묵이, 행동보다 부재가 더 많은 것을 드러내는 시기가 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얼마나 좋은 이야기를 나눴느냐보다, 헤어지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이 어떤 흔적으로 내 안에 남아 있느냐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나는 관계란 만났을 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헤어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만나자마자 좋은 사람이 아니라, 떠난 이후에도 내 마음에 조용히 머무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나의 사람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만나면 좋은 친구'를 종종 만나게 된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과 숱한 시간을 보냈다. 같이 식사하고, 좋은 풍경을 함께 보고, 웃고 떠들고, 따뜻한 말을 주고받으며 그 순간을 마음에 새겼다. 하지만 헤어진 후, 다시 그 사람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아무렇지 않다면, 심지어 약간의 공허함이 함께 찾아온다면 나는 그 관계를 조용히 보내는 쪽을 택한다. 아무리 웃으며 나눴던 시간이라도, 그것이 헤어짐과 동시에 사라진다면, 그 만남은 소모였고 소비였다. 나는 그런 관계를 지금은 담담히 보내기로 했다. 애써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남은 여운이 없다면 억지로 기억하려 들지도 않는다.
대신 나는, 헤어진 자리에 잔향처럼 남는 사람을 기억한다. 조용히 차를 마시다 문득 생각나는 말투, 하루를 정리하다가 가만히 떠오르는 눈빛, 그런 사람을 나는 내 곁에 오래 두고 싶다. 오히려 그리움이나 애틋함이 아니어도 좋다. 다만 마음속에 흐르듯 떠오르는, 아무 이유 없이 따뜻한 존재로 남아 있는 사람. 그런 관계가 내게는 더 중요하다. 함께 있을 때 좋았던 관계보다, 떨어져 있을 때 따뜻함이 더 깊어지는 관계. 그 사람을 향한 기억이 천천히 나를 감싸는 느낌이 드는 관계. 나는 그런 사람을 사랑하고, 그런 관계에만 마음을 쓴다.
나는 이제 관계를 만났을 때가 아니라, 끝난 후에 평가한다. 누가 나에게 무엇을 해줬는지보다, 그 사람이 사라진 후 내 안에 어떤 결이 남았는지에 더 주목한다. 말 많고 다정했던 사람보다, 묵묵히 곁을 지키다 떠났지만 한동안 잊히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나의 인생 안에서 진짜 관계로 남는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사람을 알아보는 데에도 시간은 필요하다. 조급하게 선을 긋지 않고, 서둘러 마음을 나누지 않으며, 부드럽고 오래된 감정을 지켜보듯 그 관계를 바라본다. 처음에는 스쳐가는 인연 같았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마음이 잦아든 어느 날 문득 생각나는 사람. 그런 인연이 내 안에 가장 깊게 뿌리내린다.
나는 만나면 좋은 사람보다, 헤어진 후에도 마음속에 오래 남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도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나는 오늘도, 어딘가에서 조용히 내 곁에 스며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기다린다. 나 역시 그에게 그렇게 기억되고 싶다. 한순간의 즐거움이 아니라, 떠나도 지워지지 않는 사람으로.
몇 번을 헤어지고 나서야 관계에 대하여 조용히 정의 내려진 사람들, 그들은 나의 삶에 진짜로 닿은 인연들이다. 나는 그들과 오랜 인연으로 물들고 싶다. 흔들리지 않고, 떠난 뒤에도 남아 있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오래도록 숨을 나누고 싶다. 내 곁에는 이제 그런 인연만이 남아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