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의 침묵을 껴 안았다

by 마르치아


"말보다 먼저 존재하는 감정은 신의 언어일지 모른다."


나는 그런 감정 하나를 껴안은 적이 있다. 말해지지 않았고, 끝내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침묵은 내게 아주 오랜 시간, 한 사람의 진심처럼 남아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전한 마음을, 내가 다 벗어내듯 꺼내어 펼쳐 놓은 그 문장을 읽고도 그 침묵은 텅 빈 바람 같았고, 나는 그 바람의 결을 더듬으며 그의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보려 했다. 그러나 바람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스쳐갔을 뿐이었다. 나는 기다렸다. 무언가 돌아올 거라는 착각을 품고, 너무도 또렷이 떠오르는 그의 눈빛을 붙들고, 시간의 가장자리에서 조용히 숨을 죽인 채로. 하지만 돌아온 건, 침묵이었다. 침묵은 무색하고 무취였지만 그 안엔 모든 감정이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모든 말을 그 침묵 안에서 읽어야 했다. 그의 침묵은 나를 찔렀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오히려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야기를 끝내겠다는 것보다 잔혹했다.


나는 그를 미워하려 했다. 하지만 미움보다 먼저 올라오는 것은 여전히 식지 않은 그리움이었고, 마르지 않은 마음 한 켠의 온기였다. 그러니 나는, 이제는 말이 아닌 그 침묵 속에서, 그의 마지막 눈빛을 다시 떠올린다. 그가 내게 남긴 것은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끝끝내 말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침묵을 지금도, 살아 있는 고백처럼 껴안고 있다. 그때는 그 침묵조차 그의 마음의 표현이라고 쉽게 단정지었다. 어쩌면 그것은 다음 말을 이어 가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합리적인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말할 용기가 없었던 것은 어쩌면 나였고, 그 용기를 끝내 그에게서만 기대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그렇게 두 사람, 이쪽과 저쪽, 그 사이에 침묵이 끼어드는 순간 거리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침묵은 조용했지만, 아주 천천히 우리를 등 돌리게 만들었다. 서로를 마주 보지 않은 채, 그저 각자의 마음속에서만 말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침묵은 우리 둘 사이에, 어쩌면 조그만 균열의 싹이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조용했지만, 그 균열은 감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점점 더 벌어져 갔다. 그리고 그 사이로 우리는 서로를 잃어버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큰 고백을 우리는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를 서로 잃어버리는 동안 침묵을 말 없이 키워가고 있었다. 그 침묵은 점점 자라, 이제는 어떤 말로도 다가설 수 없는 벽이 되었고 우리는 그 벽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서로의 마음이 어디쯤 있었는지 헤아리려 애썼다. 그러나 지나고 나니, 그렇게 크게 자라 있었는지도 모른 채 답답함만 더해갔다. 왜 그가 보이지 않고, 왜 그가 만져지지 않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나는 그를, 그는 나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끝내 닿지 못한 채 더듬고만 있었다.


그 결도 점점 잊혀져갔고, 결국에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곳의 손끝에는 침묵의 꺼끌거림만 닿았다. 사실 그 순간 손끝에 닿아지는 것은 침묵 그 자체였지만,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 무언가가 잠깐이라도 닿은 것 같아 나는 혹여 그것이 그의 잔상일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그 사이 침묵은 점점 단단히 굳어만 갔다. 마치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서서히 식어가듯 서로가 서로를 외면한 자리엔 이제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고, 어떤 숨결도 닿지 않았다. 햇살도 들지 않고, 바람이 지나도 끄떡없었다. 그곳은 이제 감정이 머물지 않는 하얗고 차가운 돌벽처럼 침묵 하나만 남은 풍경이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어느새 뻗었던 손도 멈추고 있었다. 그의 눈을 찾던 시선은 침묵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고, 그와 나는 점점 더 멀어진 사실을 그제야, 아주 느리게 알아차렸다. 우리는 서로를 찾고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각자의 침묵을 쓰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더 이상 사랑도, 갈망도 아니었고, 그저 놓아야만 하는 순간에 도달했다는 슬픈 인지였다.


나는 ‘이별’이라는 말을 떠올렸지만 입에 담지 못했다. 그 말은 너무 크고, 너무 날카롭고, 무언가를 영영 되돌릴 수 없게 만들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느새 그 단어—이…별—이 아무도 부르지 않았는데도 침묵 대신 조용히 우리 사이에 들어앉아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말이 되었고, 부르지 않아도 모든 것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이별을 인정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몸부림쳤고, 일상에 더 매달려 살았으며, 사람들을 많이 만나려 애썼다. 웃고, 말하고, 바쁘게 지냈지만 그 모든 발버둥 속에서 나는 그 이별의 정체를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를 잊은 척 하려는 모든 행동이 사실은 그를 지우지 못한 증거였고, 그 시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단지, 이별을 부정하는 몸짓뿐이었다. 발버둥 치는 것만이 내가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조용한 고백이었던 것이다.


그 발버둥 치는 내 팔과 다리를 모두 잘라내고 싶을 정도로 매운 밤도 계속 나를 관통했다. 그 밤은 날카로웠고, 숨을 쉴 때마다 마음이 찢어졌으며, 내가 도망치려 할수록 더 깊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그 밤들 속에서 울지도 못했고, 잊지도 못했고, 다만 고통을 통째로 끌어안은 채 몸 안에 침묵처럼 껴안고 살아갔다.


그러나 그 이별을, 그 침묵을 이제는 껴안고 나는 어느새 이 자리에 서 있다. 눈물이 멈춘 자리에 말이 피어났고, 절망이 머물던 자리에 조용한 이해가 뿌리를 내렸다. 나는 그를 보내는 대신, 그 침묵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살아 있고, 숨 쉬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몇 번이나 울고, 몇 번이나 아니라고 절규했던 밤들이 어느새 나에게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그 생채기들은 아프지만, 나는 이제 그 아픔을 숨기지 않는다. 그건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치열하게 붙들었는지를 고스란히 증명하는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그 모든 고요와 상처와 나지막한 울음 위에 한 문장으로 내 마음을 덮는다. 나는 그 침묵을 껴안았다. 그리고 그 침묵 안에서, 나도 조금씩 단단해졌다.


그리고 다시 사랑이 온다면, 나는 말할 것이다. 이번엔 내가 침묵하지 않겠노라고, 사랑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건너는 것임을 이제는 알게 되었노라고. 그래서 이번엔, 우리가 끝내 서로를 잃지 않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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