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너울거린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파도는 다시 나를 향해 밀려온다. 숱하지 못한 마음이 파도를 가두지 못했다. 다만 얼만치 머물지를 상상한다. 비통하게도 내게로 온 파도들은 얇디얇았다. 모래가 젖기도 전에 제 갈길 가고자 빠져나간다. 잘 털어낼 수 있었던 까닭도 나의 모래는 여짓 젖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재해와 무너질 무엇으로 이뤄졌다. 나는 파도에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어 사구를 넘어 범람하지 못하고도 충분한 곳에 성을 쌓았다. 당연하게도 다시는 바다를 볼 수 없었다. 나는 바다를 무서워했고 파도를 두려워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파도가 성의 대문을 두드리길 바랐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게 오지 않는 파도를 원망했다.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내 성은 어느 날 크게 범람했던 파도에 의해 무너졌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예전에 넘친 파도가 자국 낸 자리 안으로 성을 쌓아 올린 탓일 것이다. 아마도 그때 그 파도를 그리워 한지도 모르겠다. 다시 찾아온 파도는 재앙이 아니었을까. 나는 기다렸다는 듯 모든 권세를 내려놓고 파도에 이끌려 떠내려갔다. 가라앉아도 좋으니 파도는 내 곁에 있으라.
하얀 물 알갱이가 수면을 간지럽힐 때 나와 함께한 파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나는 소원대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것은 반쪽짜리 소원이었다. 나는 후회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목구멍으로 밀려들어오는 쓴 바닷물을 삼키며 자신의 왕국을 향해 본능적인 헤엄치는 일뿐이었다.
결국 나는 살아남았고 바다와 파도를 다시 한번 등졌다. 이따금 파도의 유리가 바스러지며 표현할 수 없는 빛으로 나를 유혹해 잠깐이나마 발을 담그곤 했지만, 예전처럼 가라앉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조금 더 자랐을 때, 그러니까 모래성의 벽을 한 뼘치 더 쌓아 올릴 수 있는 키가 됐을 때 나는 바다로부터 살아남는 법을 알게 되었다. 등지고 살지 않아도, 나를 다시 끌고 가도 온화하게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바다와 파도를 두려워한다. 감당할 수 없는 시절 겪은 악랄함이 몸속 깊이 각인돼서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의심한다. 헤엄을 칠 줄 알면서도 내 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으려 함은 혹시라도 내가 겪지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않을까 하는 이유 때문이다. 나는 또 한 번 가라앉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