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도 기한이 있다.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보여준 할머니

by The 늦기 전에
“용서는 가끔 발생하는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입니다.”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용서를 이렇게 정의했다. 좋은 말이다. 모두가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용서할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졌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며, 언쟁이나 분쟁, 나아가서는 전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용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용서는 기본적으로 상대가 어떤 잘못을 했음을 전제로 한다. 만약 과거 당신에게 금전적, 신체적으로 큰 피해를 입힌 당사자가 눈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 사람으로 인해 당신의 인생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황이다. 그리고 내 양쪽에는 버튼이 있다. 왼쪽 버튼을 누르면 내가 당한 피해의 두 배만큼 복수할 수 있고, 오른쪽 버튼을 누르면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된다. 과연 어떤 버튼을 누르겠는가?


극단적인 상상이지만, 내가 그 상황이라면 열 번이면 열 번, 백 번이면 백 번 왼쪽 버튼을 누를 것이다. 나는 권선징악의 이야기를 선호한다. 죄를 지었으면 응당 그에 맞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부처나 예수와 같은 성인(聖人)이라면 용서를 택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나의 할머니는 부처나 예수는 아니었지만, 모든 것을 '용서'할 줄 아는 분이었다.



할머니는 아들을 용서했다.


나의 아버지는 불효자였다. 태어나서 세상을 등지는 그날까지 할머니께 제대로 된 효도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할머니 입장에서 저승까지 원망을 가져가더라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나쁜 아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속을 썩였고, 할머니 가슴에 대못도 많이 박았다. 아마도 할머니가 평생을 고생하며 사시는 데는 아버지가 크게 일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용서하셨다. 물론 '말'로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말로 하는 용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아버지가 큰 사고를 당했던 날에는 가장 먼저 달려와 걱정을 해주었고, 장애를 입은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그리고 아버지가 떠나던 날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슬피 울어 주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지나 기일이 돌아왔다. 당시 할머니 건강도 좋지 않으시고, 할머니가 내키지 않아 하실 것 같아서, 아버지 제사를 지내지 말자고 했었다. 이후 제사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니 할머니는 홀로 제사상을 차리고 있었다. 집 앞 슈퍼에서 간단히 장을 봐온 모양이었다. 할머니께 물었다.


“할매 뭐할라고 아빠 제사 지내요. 잘해준 것도 없는데”

“그래도 아들인데 지내 주야지. 불쌍하게 살다 갔는데, 죽어서라도 좋은 데 가야 할 거 아이가”



할머니는 며느리도 용서했다.


할머니의 며느리, 즉 나의 어머니는 이혼 후 꽤 오랜 기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워낙 좋지 않았던 탓에 할머니는 물론이고 나와도 연락이 끊겼다. 어느 순간부터는 생사도 모른 채 살았다. 어린 시절에는 한 번 찾아볼까도 생각했지만, 이후 먹고사는 게 바빠서 어머니의 존재는 점차 잊혀 갔다.

그리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스무 살 나이에 아버지의 빈자리를 수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 20세가 되기 전에는, 부동산 계약을 비롯한 법적인 업무를 처리하려면 '법정보호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어딘가 살아계시면, 할머니가 보호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많은 일이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를 찾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할머니를 찾아왔다. 갑자기 손주만 두고 가서 죄송하다고 했고, 손주 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이제부터 친어머니처럼 잘 모시겠다고도 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어찌 보면 어머니가 안 계셨기 때문에 손주를 키우느라 모진 고생을 겪었던 할머니였다. 어쩌면 어머니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실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나와는 달리 이혼한 순간부터 어머니와 할머니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과 마찬가지였으니까.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며느리를 안아 주었다. 잘 왔다며, 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중에 할머니께 왜 그랬는지 여쭤봤더니, 다 내 아버지가 못나서 이혼했을 거라고, 그 마음 충분히 다 이해한다고 했다. 그렇게 할머니는 15년 전 연락이 끊겼던 며느리를 용서했다.


용서는 용서를 낳는다.


이후 어머니는 할머니를 정말 친어머니처럼 모셨다. 용돈을 드리고, 할머니 건강을 챙겼다. 늘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특히 내가 군대에 갔을 때는 내 몫까지 할머니가 계신 병원에 자주 찾아뵙고 간식을 챙겨주었다.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후 어머니는 요양병원에서 일하시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계시던 요양병원이 경영난으로 갑작스럽게 문을 닫았다. 임시로 집 근처에 다른 요양병원으로 옮겼지만, 그곳은 환경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자신이 일하는 요양병원으로 할머니를 모시겠다고 했다.


그곳에서 보았다. 어머니는 할머니를 정말 친어머니, 아니 그 이상으로 챙겨주고 있었다. 야간근무를 하는 날이면 근무를 마치고, 할머니 아침 식사를 손수 챙겨드린 뒤 퇴근하셨다. 오후에 출근하는 날은 출근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할머니 점심을 챙겨드리고 일을 시작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었다. 그게 마음이 편하시다고 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웠다.


사실 어린 시절 '엄마의 부재'를 겪으며 살아온 내 마음 한구석에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그 과거의 기억과 서운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떨어져 지낸 세월만큼의 거리감도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를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고, 난 어머니를 용서하기로 했다. 비록 15년이라는 공백이 있었지만, 할머니의 마지막 10년은 어머니가 돌봐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어머니를 더 이상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10년 전 할머니가 보여준 용서는 또 다른 용서를 낳았고, 이제 마음 깊이 어머니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용서에는 기한이 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버지 살아생전에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다. 그리고 할머니께 용서를 받지도 못했다. 너무 철이 없었다, 어렸었다 따위의 변명을 해보지만 말 그대로 변명일 뿐이다. 그저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언젠가' 올 것이라 생각했었다. 당시에는 용서에도 기한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영화 <암살>에서 이정재가 연기한 친일파 염석진이라는 인물은 "왜 변절했냐"는 안윤옥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어쩌면 용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누군가 왜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고, 할머니께 용서받지 못했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을 할 것 같다. "몰랐으니까,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이처럼 용서가 정말 어려운 이유는 용서에는 기한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붕은 햇빛이 밝을 때 수리해야 한다"는 존 F. 케네디의 말처럼 용서는 할 수 있을 때, 구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때가 지나면 용서할, 용서받을 기회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이 순간에도 그 기한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용서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용서하길 바란다. 또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다면 지금 당장 용서를 구했으면 한다. 나 역시 조금 더 일찍 할머니께 용서를 구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했어야 했다. 물론 아직 할머니처럼 모든 것을 용서할 만큼 아량이 넓지는 못하다. 그러나 후회 없이 살기 위해 많은 것을 용서하며 살 것이다. 부디 당신은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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