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티스트 Jul 18. 2023

누워있는 여자

3. 현실과 추억 사이

‘쏴아, 쏴아’


 거침없이 쏟아지던 굵은 빗줄기가 다시 줄어들며 집을 나가야 하는 이들의 근심도 반으로 줄어든 듯하다. 집에 있는 사람도 나가야 할 사람도 이런 장맛비는 반갑지 않은 일이지만 하루라는 일상을 시작하기 위해 각자의 목적지로 서둘러 나가야 한다.


 일찌감치 출근한 남편 뒤로 큰 장우산을 챙겨 들고 아들이 나가자 쌓여있던 세탁물들을 세탁기에 밀어 넣으며 집안일을 시작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흔적들을 따라가며 뒷정리도 하고 싱크대 위 물컵이며 어수선하게 널려있는 몇 개 안 되는 그릇들도 씻어 정리했다. 그러다 옅어진 빗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들어 창 너머 나뭇잎 위 톡톡 튕겨 나가는 빗물에 시선이 멈췄다. 그 너머로 안개가 자욱하게 올라와 있는 앞산에는 한 폭의 한국화가 그려져 있다. 재난 문자가 연신 날아오는 현실과는 정말 상반되는 저 산의 운치는 뭐라고 해야 할지 사람의 감정을 묘하게 만든다.


 집안을 대충 정리하고 식탁에 앉으며 바나나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달게 잘 익은 맛이 더없이 부드럽고 좋다. 그러고 보니 바나나는 식성이 까다로운 언니의 손자 ‘어린 왕자’도 좋아하는 과일 중 하나다. 난 그날, 그러니까 정확히는 작년 십일월 십팔일 고속열차를 타기 전 편의점을 들러 생수와 어린 왕자가 먹을 바나나 그리고 어른들도 즐길 군것질로 군고구마도 챙겨 객실을 찾아 앉았다. 


 가을의 바람을 싣고 고속열차는 미끄러지듯 달리더니 시야에서 서울을 벗어나 어느새 전원의 풍경이 펼쳐졌다. 창 너머의 푸른 햇살이 기분 좋게 손등을 간지럽히며 피부 깊숙이 스며드는 순간이다. 

 난 비닐봉지에서 주섬주섬 바나나 하나를 꺼내어 앞자리에 앉은 언니를 보며 의자 사이로 건네주었다. 어린 왕자는 조그만 입으로 새 모이를 먹듯이 오물오물 잘 받아먹었다. 

 나의 옆에선 그새 잠에 취한 딸아이의 머리가 내 어깨로 내려앉았다. 난 조용히 어깨를 내어주고 시선을 창밖 저편으로 두었다. 

 고속열차는 빠르게 목적지 부산을 향해 달렸다. 


이전 02화 누워있는 여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