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현실과 추억 사이
‘쏴아, 쏴아’
거침없이 쏟아지던 굵은 빗줄기가 다시 줄어들며 집을 나가야 하는 이들의 근심도 반으로 줄어든 듯하다. 집에 있는 사람도 나가야 할 사람도 이런 장맛비는 반갑지 않은 일이지만 하루라는 일상을 시작하기 위해 각자의 목적지로 서둘러 나가야 한다.
일찌감치 출근한 남편 뒤로 큰 장우산을 챙겨 들고 아들이 나가자 쌓여있던 세탁물들을 세탁기에 밀어 넣으며 집안일을 시작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흔적들을 따라가며 뒷정리도 하고 싱크대 위 물컵이며 어수선하게 널려있는 몇 개 안 되는 그릇들도 씻어 정리했다. 그러다 옅어진 빗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들어 창 너머 나뭇잎 위 톡톡 튕겨 나가는 빗물에 시선이 멈췄다. 그 너머로 안개가 자욱하게 올라와 있는 앞산에는 한 폭의 한국화가 그려져 있다. 재난 문자가 연신 날아오는 현실과는 정말 상반되는 저 산의 운치는 뭐라고 해야 할지 사람의 감정을 묘하게 만든다.
집안을 대충 정리하고 식탁에 앉으며 바나나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달게 잘 익은 맛이 더없이 부드럽고 좋다. 그러고 보니 바나나는 식성이 까다로운 언니의 손자 ‘어린 왕자’도 좋아하는 과일 중 하나다. 난 그날, 그러니까 정확히는 작년 십일월 십팔일 고속열차를 타기 전 편의점을 들러 생수와 어린 왕자가 먹을 바나나 그리고 어른들도 즐길 군것질로 군고구마도 챙겨 객실을 찾아 앉았다.
가을의 바람을 싣고 고속열차는 미끄러지듯 달리더니 시야에서 서울을 벗어나 어느새 전원의 풍경이 펼쳐졌다. 창 너머의 푸른 햇살이 기분 좋게 손등을 간지럽히며 피부 깊숙이 스며드는 순간이다.
난 비닐봉지에서 주섬주섬 바나나 하나를 꺼내어 앞자리에 앉은 언니를 보며 의자 사이로 건네주었다. 어린 왕자는 조그만 입으로 새 모이를 먹듯이 오물오물 잘 받아먹었다.
나의 옆에선 그새 잠에 취한 딸아이의 머리가 내 어깨로 내려앉았다. 난 조용히 어깨를 내어주고 시선을 창밖 저편으로 두었다.
고속열차는 빠르게 목적지 부산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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