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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믿음

소방관은 불을 끄지 않는다 26부

by 곰탱구리


"아 미치겠네. 근처에 CCTV도 없고 증거도 하나 없고 증인도 없고. 뭐 이렇게 없는 게 많아? 수사 방향도 못 잡고 있으니... 죽겠네"

"송형사야! 집중해라. 그나마 현장에서 제일 가까운 상가에서 수거해 온 CCTV가 수백 개다. 수백 개. 뭐라도 찾아봐야지. 죽어라 보고 또 봐라."

"눈 빠지겠어요. 이틀째예요. 집에도 못 가고 밤새고 모니터만 쳐다보느라고 죽겠습니다. 근데 팀장님은 뭐 하세요?"

"사건 현장 사진 본다. 뭔가 공통점이 있을지 모르잖아"

"이건 구월동 사건이고 저건 대부도 사건이네요. 근데 이쪽에 있는 사진은 뭔가요? 사건이 또 있었나요?"

"이거? 구월동에서 사건 발생하기 며칠 전에 노숙자 실화사건 혹시 기억해?"

"얼핏 들은 것 같기는 한데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네요. 근데 실화사건이면 이번 쇠사슬 살인마하고는 상관없는 것 아닌가요?"

"여기 봐봐. 여기 보여? 어거 말이야!"

"뭐요? 페인트 통이여? 이거 신너 하고 페인트 통이네요. 정..일..도료? 맞죠? 정일도료라고 쓰여있는 거."

"응 맞아. 시화공단에 있는 조그마한 소기업이야. 소방 시설 위반으로 뚜들겨 맞은 과태료를 납부하지 않아서 가동중지 명령으로 현재 잠정 폐업 중이야. 가봤는데 사건 현장에 널려있던 동일한 제품이 사방에 널려있더라고. 긴급하게 폐업하면서 사장이 남은 재고 다 그냥 버리고 야반도주했다나 뭐라나."

"그럼 뭐 특별한 증거도 아니잖아요."

"응 맞아. 특별한 증거는 아니야. 근데 뭔가 찜찜해. 왜 세 곳이 모두 같은 정일도료 제품이 있었을까? 여기 봐봐. 대부도 사건 현장에 있는 페인트 통은 새 거야. 사용던 제품이 아니라고. 보통 그런 곳에 폐기된 제품들은 대부분 통의 표면에 녹이 슬어있어. 그런데 이것들은 그런 게 없어. 더군다나 제일 의심스러운 것은 이 통들에서 사람의 지문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야. 아무리 작업자들이 장갑을 끼고 작업한다고 하지만 검사나 배달 과정에서 지문이 묻어나지 않을 수는 없어. 그런데 아주 깨끗해. 마치 누가 닦아 놓은 것처럼 말이야."

"그럼 우선 정일도료 제품 구입자를 중심으로 조사해봐야 할까요?"

"휴~! 그래야겠지. 근데 왠지 헛수고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폐공장에서 들고 온 것이라면 판매 이력이 전혀 없을 테니까. 그래도 일단 그쪽에라도 매달려 보자. 송형사는 막내 데리고 정일도료 관계자 수소문해서 만나보고 이형사는 페인트 대리점들 찾아다니며 근래에 도료 작업자가 아닌 일반인이 대량으로 신너 하고 페인트 구입한 적이 있는지 확인해 봐. 난 인천. 경기 지역 데이트 폭력 피해자들에 대하여 조사해 볼 테니까. 다들 힘든 거 아는데 좀 서두르자고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기기 전에 막아야지."




H의 검은 눈동자에 거대한 불기둥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가 보고 있던 핸드폰의 화면에도 동일한 불기둥이 타오르고 있었다. 6 등분된 영상의 모든 화면을 거대한 불기둥들이 뒤덮고 있었다. 눈부시게 쏘아대는 불기둥의 밝은 빛에도 불구하고 그 뒤쪽의 모습은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뒷부분은 온통 하얀 무상의 공간이었다. 공허함이 가득 차 있는 무채색의 공간이 무한히 펼쳐져 있었다. H는 그 무한의 공간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한없이 펼쳐진 무채색의 회색 공간은 H가 들어오자마자 조금씩 줄어들어 가고 있었다. 멀리 보이던 무저갱에서 기어 나온 것 같은 검은 구멍이 점차 커져갔다. 회색의 무한 공간이 놈에게 야금야금 잡아먹히며 H를 향해 조금씩 조여 오고 있었다. 검은 구멍은 검은 그림자가 되어 H의 몸을 덮어갔다.


그림자가 H의 하반신과 한쪽 어깨를 거의 삼켰을 때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그를 검은 무저갱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부지 불식 간의 일인 데다 조금도 저항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의 강력한 힘으로 끌어들였기에 H는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었다. 검은 무저갱 내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심지어 중력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H는 완벽하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빠져들어 존재감이 소멸된 듯한 공포를 느껴졌다. 스멀스멀 피어오는 공포심은 가슴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뒷 목을 타고 머리끝까지 기어올라왔다. 그것은 조금씩 뭉쳐 소름으로 변하여 다시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H는 두 팔을 들어 올려 팔에 솟아오르는 소름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H의 머릿속에서 털이 모조리 뽑히고 목이 잘려 부엌 한구석에 놓여있는 생닭 한 마리가 떠올랐다.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H의 몸뚱이를 팽개쳐 두고 홀로 어둠을 벗어나려고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막혔다. 가슴이 밧줄에 묶인 듯한 갑갑함이 느껴졌다. 팔에 돋아났던 소름이 점점 더 커져갔다. 점처럼 작았던 것이 콩 만한 크기로 이어서 작은 밤톨보다 더 크게 커져갔다. 이제 온 팔과 다리가 커다란 소름으로 가득 덮여버렸고 계속 더 커지던 소름은 각자의 영역을 침범해 서로를 마구 찌그러트렸다. 서로를 거칠게 밀어내려는 듯 힘 겨루기를 하던 소름들은 더 이상의 공간이 없어지자 하나둘씩 제일 약한 부분이 터지기 시작했다. 고름처럼 흘러나오는 붉은 핏물이 손 끝에서 무채색의 바닥으로 떨어져 검은 무저갱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던 무저갱이 H의 팔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핏물로 채워지고 있었다. 고요히 빨려 들어가던 핏물이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핏물은 본연의 원초적인 새 빨간색으로 변해가며 검은 무저갱을 넘쳐흘렀다. 부글 거리던 핏물은 회색의 모든 공간으로 침범해 들어갔다. 세상이 회색에서 새 빨간색으로 변해갔다. H의 온몸을 덮었던 소름에서 흘러나오던 핏물이 일시에 멈추었다. 잠시의 정적. 폭풍 전야와 같은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던 H는 눈만 이리저리 불안스럽게 돌리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온통 새빨간 세상에 갑자기 바람 한 줄기가 불어온다. '스스스'하는 스산한 소리를 타고 붉은 핏물에 잠겨있는 검은 무저갱에서 바람이 불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핏물이 빠져나와 쪼그라들었던 소름이 다시 돋아 올랐다. 이전처럼 부풀어 오르지는 않았지만 팔 전체를 덮고 있는 도돌도돌한 소름에 환공포증이 느껴졌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바람이 팔에 부딪쳤다. 스산한 느낌과는 다르게 바람 속에 날카로운 바늘이 숨겨져 있는 듯이 따가운 아픔이 전신에 느껴진다. 마치 고온의 열에 피부가 노출되었을 때 느껴지는 그런 고통이었다. 그렇다. 무저갱에서 솟아오른 바람은 발열지옥에서 불어온 열기를 온몸에 따갑게 퍼부었다. 꼼짝 못 하고 그 바람을 몸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던 H의 피부는 물집이 잡히더니 터져 나가기를 반복하였다. 모든 물집이 터져버리자 오히려 시원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휴!' 하는 안도의 한숨이 H의 입에서 내뿜어졌다. 그러나 그런 안식의 시간도 잠시 뿐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H는 온몸이 점차 뜨거워지는 것을 느껴지게 되었다. 고열에 터져버린 물집의 상처에 이물질이 침투해 혈관을 헤집으며 퍼져나갔다. '뭐지'하고 생각할 틈도 없이 온몸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올랐다. 외부에서 침투한 이물질이 끓어오르며 내부의 피도 들끓기 시작하였다. H는 마치 뜨거운 기름 가마솥 안에 들어있는 듯한 환각에 빠져 들었다. 누군가 2000개의 바늘로 온몸을 마구 쑤셔 대는 아픔이 느껴졌다. 비명을 질렀다. 아니 지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입과 목구멍은 외부에서 흘러들어오는 이물질로 '어푸푸'하는 의미 모를 의성어만을 간신히 뱉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지독한 고통에 H는 정신을 잃었다. 아니 잃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H의 착각일 뿐이었다. 벌어지는 모든 상황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다.


H가 눈을 감았다 뜨자 사방을 둘러싼 새빨간 핏물 속에서 검은 무저갱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서서히 들어 올려지더니 커다란 눈동자가 되어 공중에 매달린 채 H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온통 새빨간 눈자위에 한가운데 놓여있던 새까만 눈동자가 세포 분열하 듯 갈라지더니 거대한 얼굴로 변하였다.

"누구야? 너 누구야?"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으으.. 난 살인자가 아니야. 너 누구야?? 너 이수진이지?"

공중에 떠있던 거대한 얼굴이 점차 작아지면서 얼굴의 윤곽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그 얼굴은 영상 속에 있었던 이수진이었다.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에이 XX 난 살인자가 아니라고 난....."

H는 눈앞에 보이는 이수진의 얼굴을 향해 손에 들려있는 무엇인가를 힘차게 던졌다. 그러자 이수진의 거대한 얼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새빨간 피를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피를 쏟아낸 이수진의 얼굴은 괴이한 비명을 지르며 검은 무저갱 속으로 연기처럼 빨려 들어가 버렸다.


목덜미를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 H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아직도 자신이 대부 바다향기 테마파크 주차장에 홀로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위는 암흑으로 뒤덮여 있었고 자신과 4~5m 떨어진 바닥에는 깨어진 핸드폰 액정에서 나오는 하얀 불빛 만이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온통 땀에 젖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H는 그 핸드폰을 집어 들어 이것저것을 눌러보았다. 그러나 땅에 떨어질 때 강한 충격을 받은 듯 액정도 금이 갔고 핸드폰도 고장 나 작동 자체가 되지 않았다. H가 급하게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그토록 지루하게 느껴졌던 환영 속에 빠져있었던 시간은 고작 2분밖에 되지 않았다. 최소 1시간 이상 아니 거의 2시간 이상은 지났을 것이라 느꼈던 공포의 시간은 단지 2분여이었을 뿐이었다. 고개를 숙여 멍하니 고장 난 대포폰을 바라보았다. 하얗게 사방을 비추던 대포폰의 불빛마저 완전히 꺼져버리자 주변은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그와 동시에 H의 정신도 어둠 속에 끌려 들어갔다.


까무러지는 정신을 깨우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털며 눈을 뜨자 밝은 빛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자신이 아직도 대부도에 있다고 착각한 H는 또 다른 환영 속에 빠져든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위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순간 흡연실 의자에 다리가 걸려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꼴사나운 모습으로 넘어지며 비명을 질러댔다. 옆에서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후배 소방사들이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달려왔다.

"선배님! 무슨 일이세요? 어디 아프세요? 괜찮으세요? 어우야. 이 땀 좀 봐요. 진짜 어디가 많이 아프신가 보네요. 병원 가보셔야 되는 거 아니여요? 아님 구급반 이라도"

"헉헉. 아냐. 아냐. 그냥 조금 놀랬을 뿐이야.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니까 걱정 말고 담배 피워"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며 넋 나간 듯한 퀭한 눈으로 자신들을 올려보는 H를 후배들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쳐다보며 한 마디씩 말을 보탰다. 그들을 뒤로하고 H는 서둘러 아래층 화장실로 도망치듯 내려갔다. 그곳에 더 이상 머물러 있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왜 내가 살인자야? 난 구원자야. 우리 엄마가 말했단 말이야. 탈피하면서 보여줬던 아름다운 미소! 살면서 나에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 아름다운 미소로 대답해 주었어. 자신은 구원되었다고. 내가 구원해 줬다고. 사갈같은 것들. 벌레 같은 것들이 문제였던 거야. 내가 문제가 아니야. 난 살인자가 아니야! 진짜 천사를 찾아야 돼. 그래서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이 빌어먹을 세상에 보여 줄 거야. 내가 진짜 구원자라는 것을. 한 명이 아니면 열명, 백 명 아니 세상 전체를 다 불태워서라도... 반드시!"

H는 세면대에서 차가운 물로 얼굴에 흐른 식은땀을 닦아내고 거울을 쳐다보며 혼자 절규하듯 소리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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