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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본모습

소방관은 불을 끄지 않는다 28

by 곰탱구리


"팀장님! 이거 좀 봐주셔야겠는데요?"

"뭔데?"

"지난번 화성 쪽 정은영 사건 현장 감식 결과 나왔는데요, 타다 만 정은영의 차량 글로브 박스에서 범인으로 추정되는 지문이 하나 나왔습니다. 쪽지문이라 대조군이 총 47명이나 나왔습니다. 전국적으로 퍼져있네요"

"일단 서울, 인천 그리고 경기도 거주자 중심으로 추려봐. 지역별로 맡아서 다 만나봐야지. 나머지 지역 거주자는 일단 인적사항 조사만 해 놓고."

"총 18명이네요. 우리 팀이 총 4명이니까 각자 4명씩 맡고 팀장님하고 제가 한 명씩만 더 맡으면 되겠네요."

"일단 전화부터 하고 위치 확인되면 움직여. 신원확보하고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만나서 알리바이부터 확인해 봐."

"제길! 이중에 범인이 꼭 있어야 되는데..."

"그리고 최근 여성 실종자 List 보고하라고 했는데 그건 어떻게 됐어?"

"아! 그거 이순경이 아까 팀장님 책상에 놓아둔다고 하던데요? 아직 못 보셨어요?"

"그래? 어디 있지? 아! 여기 있네. 송형사! 이 중에 데이트 폭력이나 여성 보호센터와 관련된 여성들이 있나?"

"아! 그거 기타 사항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발생한 여성 실종자 중에 수도권에서 발생한 건 총 5건입니다. 그중 여성 보호센터와 관련된 여자는 2명입니다. 실종된 지는 각각 4일, 6일 경과되었습니다. 시흥 소방서의 여성 구급대원도 1명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급대원? 어디 가서 술 마시고 뻗었나 보지?"

"근데 그 여성도 5년 전에 데이트 폭력으로 여성 보호센터에서 보호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뭐? 송형사 너는 일단 시흥 소방서에 가서 상황 확인 좀 해봐"






이선희 구급 사는 커튼 사이에서 갑자기 쑥 하고 눈앞에 나타난 낯선 남자의 얼굴에 기겁을 하며 쳐다보았다.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는지, 코와 눈이 부어있었고 군데군데 피가 묻어있어 정확한 정체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남자 얼굴 뒤의 커튼이 점점 넓게 열리며 더 많은 빛이 파고 들어왔다. 눈을 여러 번 깜박거리고 나서야 주변 상황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인사에 대한 답변이 없네요. 마이엔젤?"

그 목소리는 눈앞에 있는 남자가 한 말이 아니었다. 좀 더 멀리서 들려왔다. 좀 더 자세히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눈도 입도 굳게 닫혀있었다. 아마도 이미 죽었거나 기절한 것 같았다. 이선희 구급사가 고개를 들어 좀 더 높은 곳을 쳐다보니 또 다르 얼굴이 보였다. 놀랍게도 H가 서 있었다. 기절한 남자의 목덜미 쪽 옷깃을 한 손으로 잡고 철장 쪽으로 디밀고 있었다.


"헉! H.... 씨?" H인가요? H 씨 맞나요? 왜?"

"이제 제대로 보이는가 보네요. 맞아요. 저 H입니다. 선희 씨!"

"H 씨가 왜 여기에? H씨도..."

"나도 납치되었냐고 묻는 건가요? 마이 엔젤?"

음산한 미소와 함께 H의 입에서 흘러나온 '엔젤'이라는 단어에 이선희 구급사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어... 어째서... 왜... 도대체.."

너무도 당황스러운 상황에 이선희 구급사는 제대로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런 모습을 H는 매우 즐거운 표정으로 여유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궁금해요? 내가 왜 이러는지? 그럼 보여줄게요"

H는 쪼그리고 있던 다리를 펴고 일어나며 손에 잡고 있던 남자의 목덜미를 놓았다. 남자의 얼굴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내렸고 그 충격으로 코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이선희 구급사가 남자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H는 그녀의 주위를 덮고 있던 암막 커튼을 완전히 걷어냈다.


찢어진 시트지를 통해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내부는 피어오르는 먼지가 미치 슬로비디오처럼 뿌옇게 공기 중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시뻘겋게 녹슨 기둥들, 군데군데 검은 때로 오염된 벽면, 본래 녹색이었으나 이제는 희미하게 자죽만 남아 허옇게 갈려버린 바닥. 여기저기 널려있는 쓰레기와 천장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거미줄.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는 어딘가의 창고란 느낌이 들었다. 이선희 구급사는 창고 한구석에 큰 도사견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철창에 갇혀있었다. 한쪽 발에는 굵은 쇠사슬이 묶여 있어 철창이 아니더라도 탈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여기가 어딘가요? 그리고 왜 H 씨가 저를? 그리고 이 남자는?"

"아! 선희 씨 궁금한 게 무척 많으시죠? 잠시만 기다려요. 준비가 다 되면 알려드릴게요."

H는 기절해 있는 남자를 질질 끌고 이선희 구급가 갇혀있는 오른쪽 구석으로 갔다. 그곳에도 그녀가 갇혀있는 철창과 동일한 크기의 철창이 검은 방수포에 덮여있었다. H가 방수포를 걷어내자 그곳에도 누군가 쇠사슬에 발이 묶인 채 갇혀있었다. H는 끌고 간 남자를 철창에 밀어 넣고 철창 안에 있는 여자의 발목을 묶고 있는 쇠사슬에 남자의 목을 묶고 열쇠를 채웠다. 살짝 보이는 얇고 하얀 발목 덕분에 묶여있는 대상이 여자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시는 건가요?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마이 엔젤!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참을성이 없는 분이시군요 선희 씨는. 그런 분이 8개월의 애인의 폭력은 어떻게 견뎌냈는지?"

"H 씨가 그걸 어떻게?"

"구원자가 자신의 천사에 대해서 몰라서야 말이 안 되지. 난 당신에 대해 모르는 게 없지요. 나의 천사님!"

H는 말하는 와중에도 기절한 남자의 몸에 쇠사슬을 여러 번 돌려 감았다. 그러고는 철창의 문을 자물쇠로 잠그고 다른 귀퉁이 쪽으로 다가갔다. 각각의 귀퉁이에도 동일한 철창이 놓여있었다. 5평 남짓한 창고에 각 모퉁이마다 4개의 철창이 놓여있는 것이었다. 창문의 찢어진 시트지 사이로 얼핏 푸른 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너무도 맑은 하늘이었다. 각각의 철창을 둘러본 H는 드디어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제 다른 곳은 준비를 다 끝냈고 여기만 끝내면 드디어 모든 준비를 다 마치게 되네요. 나의 천사님! 많이 기다리셨죠? 이제 오롯이 천사님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네요. 자! 이제 뭐든 물어보세요. 무엇이든 정성껏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H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페인트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작고 지저분한 플라스틱 의자를 철창 앞에 놓고 쭈그려 앉았다.

"왜?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건가요? 어쩌시려는 것인가요?"

"우선 왜 이러냐는 질문부터 답변드리지요. 제가 이러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구원해 드리려고 그러는 겁니다. 선희 씨 아니 천사님을 이 지상의 고통에서 벗어나 원래의 천상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구원해 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둘째로 어쩔 것이냐는 것에 대한 답변은 지금 보시다시피 구원을 위해서는 약간의 고통이 필요합니다. 천사와 구원자, 하늘이 기운이 극에 달하는 개기월식이 시작되는 적절한 시기, 지독하게 들러붙어있는 껍데기를 모두 벗겨내기 위해 땅의 기운을 불러오는 강력한 불길.... 이런 것들이 이제야 다 준비되었으니 천사님들 모두를 탈피시켜 구원해드리려고 하는 것이지요. 이해가 되시나요?"

"이해는 무슨 이해요? 하나도 모르겠어요. 뭐가 천사고 구원이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모두 다 풀어주세요. 그럼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다른 사람은 제가 설득할게요. 아무 일 없게 잘 설득할게요.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들 수 있어요. 네? H 씨? H 씨 이런 사람 아니잖아요?"


H는 절규하듯 외치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하였다.

"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만들겠다고? 네가? 너 따위가? 자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감히? 우습군. 우스워.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냐 아냐. 명색이 구원자인데 이렇게 화내면 안 되겠지. 천사님. 잘 들으세요. 이선희 씨 당신은 천사입니다. 저 네 개의 귀퉁이에 묶여 있는 사람들도 천사고요. 음. 엄밀히 말하면 천사 후보지만요."

"난 그런 게 아니야. 천사? 그런 게 뭔데? 당신이야 말로 내가 뭔지 알아?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천사? 웃기고 있네. 지옥 바닥에서 기어 다니는 악마도 그렇게 힘들게 살지는 않았을 거야."

"그건 당신이 천상에 있을 때 죄를 지어서..."

"내가 하늘에서 어떤 짓을 했는데? 알아 당신이? 내가 하느님을 죽이기라도 했어? 신성모독이라도 했어? 아니면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기라도 했어? 어떤 죄를 지었는데 이렇게 힘든 삶을 살게 하는데? 누가 그렇게 결정했는데? 그게 하느님이고 네가 구원자라면 내가 돌아갈 곳은 절대 천국이 아니야. 지옥보다 더 무섭과 지독한 곳일 뿐이지."

"너 따위가 뭘 안다고? ㄴ..."

"넌 알아?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알아? 내 죄가 무엇이었는지 알아? 내가 갈 곳이 어딘지 알아? 쥐 뿔도 모르는 건 너야. 넌 구원자 따위가 아니야. 그냥 살인자일 뿐이야. 사람을 죽이면서 쾌감을 느끼는 살인자."


"아냐. 난 구원자야. 엄마가 그랬어. 불 속에서 천사로 변신하면서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어. 그리고 말해줬어. 구원해 줘서 고맙다고. 더 할 수 없는 극한의 밝은 빛으로 변해서 하늘로 올라가며 말했어. 엄마는 천사고 나는 그런 천사를 구원해 준 구원자라고. 뭐.... 내가 아직 구원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천사를 고르는 능력이 뛰어나지 않아서 앞에 선택했던 여자들은 구원해 주지는 못했지만. 뭐 그런 벌레들을 죽이는 것도 구원자의 의무니까 상관은 없지."

"근래 일어났던 연쇄 방화사건 당신이 한 짓이었어?"

"짓이라니? 의식이었지. 천사를 탈피시키기 위한 성스러운 의식"

"생명을 산채로 불태워 죽여놓고 의식이라고? 그건 살인일 뿐이야. 그냥 더럽고 역겨운 살인. 어떤 하느님이 살아있는 생명을 강제로 죽여서 천사로 만들라고 하겠어? 그런 하느님이 있다면 그건 하느님이 아니야 그냥 악마 그 자체지. 그냥 벌 받고 스스로 깨우쳐 하늘로 돌아오도록 기다려 주는 것이 더 맞는 일이지, 강제로 불태워 죽이는 것이 성스러운 의식이라고?"

"아니라고. 아빠한테 매일 죽도록 맞고 살던 엄마가, 살면서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엄마가, 엄마가 그랬단 말이야. 불 속에서 웃으며 나한테 분명히 말해줬단 말이야."

"당신의 착각일 뿐이야. 불 속에서 웃을 수 있다고? 아냐 그냥 피부가 불에 일그러진 것뿐이야. 절대 불에 타는 고통을 웃으며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아냐. 아냐 난 단지..."


"H 씨. 아직 안 늦었어요. 제발 현실을 똑바로 쳐다봐요. 사람들 풀어주고 자수하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H 씨는 이런 사람 아니잖아요. 제발요. 제발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이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에요. 매일매일의 폭력과 밤마다 반복되는 의붓아빠와의 지옥 같은 시간들 때문에 죽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하지만 내가 죽으면 그건 그 사람들에게 굴복하는 것이라는 생각하게 들었어요.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서 버텼고 하루하루 지옥 같은 시간을 이겨내고 이렇게 살고 있어요. 제가 구급사가 된 것도 나같이 힘든 사람들이 비겁한 폭력에 희생되지 않게 하려고, 또 불행에 굴복해 스스로를 버리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에요. 그렇게 힘들게 하루하루를 이겨나가며 살고 있는데 타인에게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면 이건 구원이 아니라 저주예요. 저주. H 씨는 구원자라면서요 제발 불행한 사람들이 더 불행하게 되지 않게 해 주세요. 잔인하게 살해당하지 않게 해 주세요"

이선희 구급사는 H의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H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H의 손 위에 얹어지자 H는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찌릿한 자극을 느꼈다. 깜짝 놀라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H의 눈에 마치 비문증이 걸린 것처럼 무언가 수없이 많은 알갱이들이 일렁거리더니 그녀의 얼굴이 차츰 다른 무엇인가로 변해갔다. 작아지고 커지고 파도에 흔들리는 듯 일렁이더니 그녀의 얼이 조금씩 엄마의 얼굴로 변해가고 있었다.


엄마의 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맞아서 부서진 듯 오른쪽 광대는 함몰되어 퍼렇게 멍들었고 윗입술과 아랫입술은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지옥의 무저갱 속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듯한 음습한 목소리가 저음으로 세상 속에 퍼져 나왔다.

"사...이...자.....살.....인.....자....살...인...자..살..인..자..살.인.자.살인자.살인자. 이히히히히히히히"

"아냐 아냐. 엄마가 그랬잖아. 내가 구원해 줬다고. 근데 왜 살인자라고 해? 난 살인자가 아냐. 아니라고. 그래 엄마! 내가 보여줄게. 이렇게 많은 천사 후보님들을 모셔왔어. 진짜 구원을 보여줄 테니 잘 지켜보라고. 크크크크 나는 살인자가 아니야. 난 구원자야. 이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





"제가 김성중인데요? 무슨 일로 절 찾으시나요?"

"아! 남동서 강력계 형사 박찬유입니다. H 씨하고 제일 친하시다고요? 지금 H 씨 어디 계신가요?"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오늘 연차내고 퇴근했니다. 아마도 병원이나 집에 있지 않을까요? 무슨 일입니까? "

"혹시 H 씨가 집 말고 자주 가는 곳이 있나요?"

"글쎄요? 같이 자주 가는 술집은 있는데 대낮에 거기 가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H 씨가 요즘 평소와 다르게 좀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아니 뭐.. 좀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기는 했지만 그거야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 겁니까? H가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습니까?"


그때 상황실 문이 벌컥 열리며 소방서장이 매우 화난 얼굴로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야! 김성중. 빨리 제대로 말씀드려. H 그 미친 XX가 연쇄방화 살인범이래. 본청의 박찬기도 그 새끼가 납치해 갔단다. 빨리 구하지 못하면 큰 낭패를 겪을 수도 있으니 아는 데로 다 말씀드려. 미친 XX! 소방관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가 있지. 빨리!"

"네? 그럴 리가. H가요?"

"뭐가 그럴 리가야? 박찬기 뒤통수를 망치로 내려치는 모습이 박찬기 마누라 블랙박스에 고스란히 녹화되어 있다는데... 이선희 구급사도 이 새끼가 납치한 거 아냐?"

"핸드폰.. 핸드폰.. 제가 전화해 볼게요."

"핸드폰은 꺼져있습니다. 휴 일단 H 씨 자리하고 사물함 위치나 알려주세요."

그때 상황실 문이 또 한 번 벌컥 열리더니 형사 한 명이 뛰어 들어와 박팀장 쪽으로 뛰어왔다.

"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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