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은 불을 끄지 않는다 29
"안녕하십니까? MBD 저녁 뉴스의 엄기성 앵커입니다. 오늘은 3년 만에 우리를 찾아온 개기 월식 소식부터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정희 기자!"
"네 안녕하십니까? 이정희 기자입니다. 저는 지금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국토 정중앙 천문대에 나와있습니다. 잠시 후 50분 뒤, 3년 만에 다시 발생하는 개기월식이 시작되는데요, 관계자는 이번 블러드문은 예년과 다르게 주변이 밝지 않은 도심의 뒷산에서도 그 모습이 관찰될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보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 팀장님! 박찬기 씨의 핸드폰 위치 추적되었습니다. 시흥공단 쪽입니다. 그리고 H의 핸드폰도 같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뭐? 빨리 차량 준비하고 그쪽으로 전부 출동시켜. 시흥 경찰서 쪽에도 협조 의뢰하고"
"나도 같이 가겠습니다. H가 그럴 놈이 아닙니다. 저도 같이 가게 해 주십시오."
"김성중 씨라고 하셨나요? 지금 김성중 씨 혼자 가서는 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서장님.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소방서도 화재 출동이 가능할까요? 범인은 사람들을 불에 태워 죽이는 연쇄 살인범입니다. 이선희 구급사와 박찬기 차장 두 명이 같은 장소에 납치되었다면 H는 또 불로 태워 죽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출동을 부탁드립니다."
"네? 네. 네. 네. 1 팀장 얼른 비상 걸고 출동해. 그리고 성중이는 혹시 H가 범인이 맞다면 최대한 잘 설득해 봐. 네가 그래도 제일 친한 친구잖아. 1 팀장 잠시만..."
"네. 서장님!"
"음... 박찬기 팀장을 우선적으로 구조하고 주변에 신문기자나 일반인의 접근을 반드시 막아. H가 소방관이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절대 안 돼. 모든 소방관의 명예가 달린 일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H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사방에 페인트와 신너를 뿌려댔다. 코를 찌르는 휘발성 용제의 냄새가 점막을 자극해 왔다. 그러고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녹색으로 된 나이론 재질의 방수포를 잔뜩 끌고 들어와 창고 가운데에 쌓아 놓았다. 작업이 거의 다 이루어지자 극도로 흥분했던 H는 서서히 냉정함을 되찾았고 예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가 콧노래까지 부르며 작업을 진행하였다. H가 각 귀퉁이에 놓인 철장의 암막 커튼을 하나씩 걷어내자 각 철장의 내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네 개의 철장에는 한 명, 혹은 두 명의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모두 쇠사슬에 묶여있었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잠시 후면 다 깨어날 거야. 약 기운이 다 떨어질 때가 되었거든."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요? 왜?"
"모르겠어? 내가 왜 이렇게 까지 하는지? 너를 위해서야. 내가 아닌 너희들을 위해서 내가 오히려 희생하고 있는 거라고. 이 세상에서 고통받고 있는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러는 거라고. 우리 엄마도, 너희들도 이 세계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잖아. 이제는 탈피를 하여 구원을 받고 행복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야지. 나는 그것을 돕는 것이고. 그게 이유야. 정말 몰라? 이해가 안 돼?"
"이해? 구원? 미친 새끼. 우리가 언제 너한테 구원해 달라고 부탁한 적 있어? 상대가 원하지 않는 행위는 친절이나 선행이 아니야. 또 하나의 폭력일 뿐이지. 우리는 그 거지 같은 시간들을 싸워왔고 하루하루 힘겹게 이겨내고 있어. 왜 네 마음대로 구원이니 뭐니 떠들어 대는 거야?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아? 구원? 웃기지 마!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은 평범이야. 다른 사람들처럼 아침에 짜증 내며 일어나 힘들게 회사로 출근해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살아가는 일상적인 삶. 그 속에서 울고 웃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냥 남들처럼 주어진 생명이 멈출 때까지 평범하게 사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장 바라는 거야. 알기나 해?"
이선희 구급사는 말을 하며 스스로 감정이 격해져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H를 쏘아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H는 그런 이선희 구급사를 내려다보며 마음이 격하게 동요됨을 느꼈다.
"그러니까 구원해 주려는.."
"이 미친 새끼야! 내가 너한테 구원해 달라고 원한 적 한 번이라도 있어? 너도 우리를 때리고 성폭행하고 짓밟은 그 짐승 새끼들과 똑같은 새끼야. 우리는 원한 적도 없는데 혼자서 사랑이라고 독단적인 생각을 하고 우리가 원할 것이라 결론짓고 조금이라도 자기들이 원하고 생각하는 데로 하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하고 그게 사랑이라 애정이라 여기는 놈들이랑 지금의 너의 모습과 뭐가 달라? 넌 구원자가 아니라 그냥 살인자야. 우리를 핍박하는 또 한 명의 가해자일 뿐이야."
"아냐. 아냐. 난 구원자야. 나를 흔들려고 하지 마. 이제 곧 개기월식이 시작될 시간이야. 달의 문이 열리는 시간이지. 지구에 떨어진 불쌍한 천사들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이 열리는 것이야. 난 보았어. 우리 엄마가 하늘로 날아오르던 날 붉게 물든 불러드 문의 그 아름다운 모습을. 엄마는 날개를 달고 붉은빛을 따라 달 속으로 나아갔어. 아빠의 폭력에 일그러지고 멍든 얼굴이 아닌 환하게 꽃처럼 피어나는 모습으로 붉게 물든 길을 사뿐사뿐 밟으며 걸어갔어. 너희들도 그렇게 될 거야. 보여 줄게. 그럼 믿게 될 거야."
정일도료는 시흥의 시화공단 화학단지의 가장 바닷가에 위치하는 작은 공장으로 주변의 공장들이 경영 적자를 견디지 못해 다 폐업하는 바람에 홀로 외떨어져 있던 공장이었다. 그런데 정일도료 마저 H의 안전 소방점검 시 부여된 벌금을 내지 못해 문을 닫는 바람에 그 지역은 밤이 되면 마치 유령의 도시처럼 인적조차 드문 그런 곳이었다. 불 꺼진 공장들의 을씨년스러움이 공포를 더욱 자극시키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되도록이면 그곳으로는 운전해 지나는 것도 회피했다. 그런 곳이 오늘 밤은 꽤나 소란스러워졌다. 여러 대의 경찰차와 그 뒤를 따라 급하게 몰려오는 소방차들의 사이렌 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쳤다. 범인에게 제발 이제 그만 범행을 멈추라고 절규하는 비명처럼 울어댔다.
"제길!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벌써 오면 곤란한데... 그냥 먼저 저질러야 하나? 아냐 아냐. 그래서는 안 돼. 난 구원자잖아. 그건 일반 살인자들이나 저지를 법한 일이야. 나는 그래서는 안 돼."
"웃기고 있네. 살인자 새끼! 어떠한 이유로든 타인의 의지를 반해서 저지르는 폭력은 정당화되기 힘들어. 너의 말대로 그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면 왜 예수님이나 부처는 살생을 그리도 반대하셨을까? 네가 옳다면 그분들은 희대의 학살자가 되었어야 맞잖아. 왜 우리에게 힘들고 고달픔 삶을 그냥 살게 두셨겠냐고? 다 죽여서 하늘로 불러들이시면 되지?"
"그분들은 그분들 데로의 방법이 있고 나는 나 데로의 방법이 있는 거겠지."
"너의 엄마는 진짜로 구원되었을까? 정말 천사가 되었다고 믿어? 너의 지금의 모습을 손뼉 치며 잘했다고 하셨을까? 확신해?"
"시끄러워! 그래 믿어. 엄마는... 엄마는... 천사가 되었어. 진짜. 천사가... 천사가... 되었을 거야."
"제발! H 씨 당신도 확신이 없잖아. 엄마가 진짜 천사가 되었다면 아마도 이런 H 씨의 모습에 너무도 슬퍼하시고 계실 거야. 당신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당신도 두렵잖아. 무섭잖아. 이것이 구원이 아닌 살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거잖아."
"아냐~! 아냐~! 난 그저..."
"알아요. H 씨. 불쌍하고 가여운 엄마 같은 사람들을 구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요. 그 마음 알아요. 그런데 방법이 잘못되었어요. 이건 구원이 아니에요. 죽도록 힘들어도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사람들이었잖아요. 이건 구원이 아니라 살인이에요. 제발 이제 그만해요. 엄마도 그걸 바라실 거예요."
"난... 난... 그저"
그때였다. 창고의 찢어진 시트지를 통해 외부로부터 강렬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H! 이제 허튼짓하지 말고 어서 자수해.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인질들을 풀어주고 자수해!"
"영화에서 보면 늘 경찰은 일이 다 끝나고 나면 오더니 이럴 때는 더럽게 빨리 나타나는군. 역시 영화와 현실은 많이 달라. 그렇지, 선희 씨?"
"H 씨. 이제 다 끝났어요. 살인은 여기서 멈추고 자수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제발요."
"H! 넌 포위됐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어서 인질 풀어주고 자수해."
"H야! 나야 나. 성중이. 네 친구 김성중. 임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네가 어떻게 이래? 나랑 같이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고 재산을 보호하겠다고 그러게 맹세하고 소방관이 되었던 거잖아. 네가 살인자라니? 이건 아니잖아. H야. 이건 네가 아니야. 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불 속에도 뛰어들었던 착한 소방관이고 나의 절친한 친구 H란 말이야! 어서 나와.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
"성중아! 미안해. 하지만 이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야. 구원자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그냥 이해해 줘!"
"H야 우리 사람들을 구하려고 소방관이 되었잖아. 살인은 어떠한 이유로도 변명이 될 수 없어. 제발 내 친구로 돌아와 줘. 같이 불 속에서 울고 웃었던 내 친구로."
"좋아! 조금만 더 하면 설득할 수 있겠어. 김성중 씨는 계속 H를 설득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경찰 특공대는 도착했어?"
"네 팀장님. 건너편 건물 2층에 저격수 배치 완료했고 후문과 창고 뒤쪽까지 모든 도주로를 차단하였습니다."
"네? 저격수요?"
"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것입니다. 지금 성중 씨는 H를 설득하는 것에 전념해 주세요."
"그렇지만..."
"부탁드립니다. H 씨가 가족이 아무도 없더라고요. 김성중 씨 말고는 H를 설득해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잘 설득해야 저 안에 납치된 인질과 H 씨 자신까지 모두 안전하게 구조할 수 있습니다."
그때 뒤늦게 도착한 경찰차에서 경기남부 경찰청장이 내렸다. 그러고는 상황실로 사용하고 있는 정문 경비실로 다가왔다. 박팀장은 비록 직속상관은 아니지만 현재 있는 곳이 경기도 시흥시였고 자신보다 상관이었기에 경례를 붙였다. 경기남부 경찰청장은 그런 박팀장을 쓱 한번 쳐다보고는 크게 소리쳤다.
"야! 여기 지금 책임자가 누구야?"
"네 시흥 경찰서 이수백 총경입니다."
"근데 왜 딴 놈이 설치고 있어? 너 일 제대로 안 할래?"
"죄송합니다. 근데 인천 쪽과도 연결된 사건이라...."
"여기 지금 장소가 어디야? 여기가 인천이야? 이 새끼야! 넌 관할구역도 제대로 구분 못해?"
"아닙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이곳은 우리 경기남부 경찰에서 총괄한다. 이수백! 현재 상황 보고해!"
박팀장과 남동서 형사들은 상황실 밖으로 밀려 나왔다.
"XX! 관할은 무슨. 내가 언제 지들 실적 뺏아 먹겠데? 같이 범인 잡자고 이러는 거지?"
"박 팀장님! 이제 어쩌죠?"
"송형사야. XX! 계급이 깡패인데 어쩌겠냐? 추이나 지켜보자고... XX. 인질들이나 별 탈없이 구조돼야 하는데 어째 쫌 기분이 더럽네."
이수백 시흥 경찰서장의 브리핑을 들은 경기남부 경찰청장은 즉시 경찰 특공대의 투입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수백과 주변의 경찰들은 인질이 다칠 것을 염려하여 이를 만류하였다. 김성중을 통해 자수를 좀 더 권고해 보자고 하였다. 그럼에도 경기남부 경찰청장은 강력한 압박을 해야만 범인이 부담감을 느끼고 범행을 포기할 것이라며 창고 근처로 특공대를 전진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특공대들이 어쩔 수 없이 창고 문 앞으로 조심스레 전진하는 순간 갑자기 창고의 문이 옆으로 드르륵하는 소리를 내며 반쯤 열렸다. 그리고는 불붙은 지포 라이터를 손에 쥔 H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신너에 흠뻑 젖은 이선희 구급사를 자신의 앞에 방패로 세운채 경찰에게 소리쳤다.
"모두 나가! 안 그러면 여기 바로 불 붙여 인질 모두를 죽여버리겠어. 여기 내부는 지금 페인트와 신너를 듬뿍 뿌려놨기 때문에 이걸 던지면 바로 불이 붙어 버릴 거야. 인질들 모두 다 죽는 거야. 그러니까 물러서."
"H 씨! 자수해요. 라이터 버리고 자수해요."
"자수? 그건 죄를 지은 사람이나 하는 거고. 난 그런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틀려. 난 구원자야. 이 사람들 구원할... 그리고 나 자신도 구원받을 거고."
"네? 뭐라고요?"
"난 예수나 부처가 아니야.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의 방법으로... 난 우리 엄마를 믿어"
"이 미친 XX새끼! 살려줘요. 개기월식이 시작되면 이 미친놈이 불을 붙일 거예요. 빨리 월식이 일어나기 전에 살려주세요."
"이런 XX 년이!"
이선희 구급사의 공포스러운 절규와 함께 H를 창고로부터 끌어내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앞쪽으로 구부리자 H의 몸이 휘청거리며 이선희 구급사의 목을 조이고 있던 팔이 풀어졌다. 이선희 구급사는 이마를 바닥에 찌으며 쓰러졌고 그런 이선희 구급사에게 분노한 H는 불붙은 라이터를 던지려고 손을 들어 올렸다. 바로 그때 세 발의 총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을 흔들며 울려 퍼졌다.
"탕! 타탕!"
핏빛으로 물든 거대한 블러드 문에 H의 몸에서 튀어나오는 붉은 방울들이 더욱 붉게 물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