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물멍'(물을 보며 멍 때림)이라는 말이 있듯, 바다가 주는 어떤 흥취가 있는 모양이다. 저 멀리 어디까지 펼쳐져 있는지 모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거든,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드는 모양이다. 그래서 머리가 복잡한 사람들은,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뒤따르는 꼬마들처럼, 바다로 향한다.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머리의 복잡한 생각들이 바닷바람과 함께 날아가길 기대하며.
그렇지만 나는 수평선을 볼 때마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수평선을 응시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수평선 너머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수평선까지 헤엄쳐 가더라도 자기가 바라보던 그 수평선에 도달하는 순간 끝없이 펼쳐진 또 다른 수평선을 맞이하게 될 것이므로.'
이 생각은 일견, 무지개를 좇던 아이가 무지개가 걸리던 동산에 가보니 아무것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수평선 너머를 보려 헤엄치는 아이와 무지개 동산을 찾아 뛰어다니는 아이는 다르다. 왜냐하면, 전자의 아이가 마주친 것은 또 다른 수평선이지만 후자의 아이가 마주친 것은 텅 빈 허공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눈치 빠른 독자는 툴툴대며 이렇게 말한다. "치, 새로운 수평선도 결국 내가 찾으려 했던 수평선이 아니라는 점에서 허공이나 다를 바 없잖아요!" 지당하신 말씀. 당신이 바라보던 수평선의 정확한 위도/경도와, 당신이 지금부터 바라볼 수평선의 위도/경도는 다를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나중의 수평선이더라도 여전히 수평선 아니던가.
행복은 수평선과 같다: 궁극 목적으로서의 행복(eudaimonia)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그렇지만 그 주장을 제대로 이해했거나/이해하려 시도한 사람은 드물 법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eudaimonia)이야말로 삶의 궁극 목적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또 누군가 딴지를 걸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닌데? 나는 돈을 잔뜩 버는 게 삶의 궁극 목적인데?" 그러나 성격 더러운 사람이 그리스에 없었던 게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답한다. "그럼 당신에게는 돈을 잔뜩 버는 게 행복이겠군요." 또 누군가는 딴지를 걸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닌데? 나는 세상 온갖 미녀와 잠자리를 갖는 게 삶의 궁극 목적인데?" 난봉꾼이 그리스에 없었던 게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당신에게는 세상 미녀들과 잠자리를 갖는 게 행복이군요." 또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저는 봉사활동을 하다가 죽는 게 삶의 목적입니다만" 자선사업가가 그리스에 없었던 게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봉사활동이 행복이군요."
행복은 이렇듯, 그 내용물은 다를지라도 그것 너머의 것을 목적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마치 수평선과 같다.
행복의 필수 조건 : 사람답게 사는 것.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부자의 삶, 난봉꾼의 삶, 봉사자의 삶을 한데 깡그리 묶어, "너네 모두 그게 궁극 목적이라고 믿기만 한다면 행복한 거야!" 하며 대책 없는 긍정론이나 상대주의적인 입장을 펼친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삶이라고 말한다. 사람답게 사는 게 뭔데요?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우선 살아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살아있는 것들(생물)은 크게 세 분류가 가능하다.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 둘, 움직이긴 하나 생각은 못하는 동물. 셋, 움직이기도 하고 생각도 하는 인간. 여기서 인간에게 고유하게 허락된 것은 바로 사유와 숙고를 통한 실천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잘 숙고하고, 그에 따라 실천하며 사는 삶 사람답게 사는 것이며, 그것이 행복하게 사는 조건 중 하나라고.
이렇게 잠정적으로 행복의 정체를 들춰보면, 부자의 삶이나 난봉꾼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백 억을 벌거나 백 명의 미녀와 밤을 보냈다고 해보자. 그래서요? 삶의 목적을 이루었으니 이제 하늘로 승천이라도 하시게요? 이렇듯 감각적이고 일차적인 목적은, 결코 삶의 궁극 목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이런 목적을 삶의 궁극 목표로 삼는다면, 그는 사유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목표를 잘못 설정한 것이거나, 목표를 제대로 설정했다고 하더라도 그 목표물의 내용이 인간다운 것이 아니기에, 그 목적을 위해 산다면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쫓고 있던 건 수평선이 아니라 무지개였는지도 모른다.
식욕이나 성욕에 헐떡거리며 침을 질질 흘리는 삶을 행복으로부터 배제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수평선이 남는다. 엥? 또 생뚱맞게 수평선이라고? 그래, 수평선.
나를 포함해서, 보통의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수평선을 설정할 때, '진짜 수평선'을 설정하는 데 실패하곤 한다. 식욕과 성욕에 침을 질질 흘리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대학 타이틀에 침을 질질 흘리며, 취업할 회사 네임밸류에 침을 질질 흘리며, 이제부터 벌게 될 돈에 침을 질질 흘리며, 뭔가를 자기 생애의 수평선으로 삼은 채로 삶을 항해한다. 그리고 부단한 고난과 노력 끝에, 목표하던 대학/회사/통장잔고에 도달한다.
자, 이제 뭐가 남을까. 사실 우리가 쫓고 있던 건 수평선이 아니라, 무지개였는지도 모른다. 성취되어 버리고 사라질 목표라면 분명 그 정체는 "궁극" 목적으로서의 행복이 아니다. '무지개 동산만 올라가면 무지 행복할 거야!' 하는 믿음은 거짓임이 판명 났다. 자, 이제 주위를 둘러보라. 수평선이 보이는가? 그곳으로 항해하라. 또 다른 수평선이 펼쳐지는가? 또 그곳으로 항해하라. 망망히 펼쳐진 수평선 가운데 무엇이 인간다운 삶일지 숙고하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삶의 항해야말로 좋은 삶, 행복한 삶이라 말한다.
수평선을 향해 산책하는 삶은 퍽 행복한 삶일 것이다.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솔직히 수평선을 따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삶을 살기에는 기력이 없다. 꾸준히 수평선 너머의 또 다른 수평선을 찾아 천천히 산책하겠다. 그러다가 숨이 차면 한 번씩 누워서 이렇게 정신승리 하리라. "그래, 내가 부유하고 있는 여기도 누군가에게는 수평선(무지개) 일지 몰라." 그러다가 다시 일어나서 뚜벅뚜벅 수평선을 향해 산책하겠다. 그러다 망망한 바다 위에서 산책할 기력도, 누워서 정신승리할 기력도 없다면 물거품을 내며 죽을 것이다. 퍽 행복한 삶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