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재준 Jul 06. 2023

비평이란 무엇인가?

삶을 비평하는 일이란

 애인과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중이었다. 영화가 시작하고 5분, 캐릭터의 서사가 쌓여나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소설, 만화, 영화를 막론하고,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면, 인물이 등장하는 첫 장면에는 언제나 중요한 함의가 있기 마련이다. 인물과 독자/관객이 만나는 첫인상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훈련된 비평자는 인물의 첫 등장에서, 작품이 말하고 싶은 인물의 정보가 무엇일지를 고민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애인이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캐릭터의 서사 구축을 위해 헌신적인 부모의 희생이 묘사되는 장면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애인에게 손수건과 생수를 건넸다. 울 땐 울더라도 수분 보충은 필요해... 어디서 주워듣기로 미녀는 물을 많이 마신다더라고...이제 다 울었니? 마저 영화를 보자.


비평은 대상과의 거리두기를 요구한다


 텍스트 비평을 주로 하는 전공에서 훈련을 받은 탓인지, 내게 텍스트를 접하는 일은 단순히 텍스트의 언명을 그대로 수용하는 일 이상의 것이 되었다. 텍스트가 전제하고 있는 선결되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무엇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지, 텍스트의 언명을 받아들이면 후속하여 발생할 문제들은 없을지, 텍스트와 경쟁하는 다른 입장들은 무엇일지 고려한다. 항상 위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내게 비평은 거의 습관적인 것이 되었다.


 비평이란 비평의 대상을 그저 수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면, 비평은 필시 텍스트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둘 것을 요구한다. 대상에 함몰되지 않는 일정한 관점을 유지해야만 비평이라는 행위가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 구절에 심취한 나머지, 성경을 달달 읊는 기독교 신도를 생각해보라. 이 신도는 경건한 종교활동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신학비평은 할 수 없다. 텍스트의 메시지에 함몰되었기 때문이다. 신께 기도드리기를 잠시 멈추고, "신이란 무엇인가?" 되물었을 때 신학비평이 시작될 것이다.


 같은 이유로 비평은 모사(replication)나 반복(repetition)과는 다르다. 아래 그림을 보라.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어디선가 보았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와, 그 제자의 모작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와, 그 제자의 모작

 묘하게 색감이 다른 두 작품이지만, 오른쪽 그림이 모사하고 싶었던 대상은 <모나리자>의 원본이었으리라. 모사와 반복은 특정한 대상을 원본 그대로 옮겨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비평이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상에 접근한다. 비평이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둘 것을 요구한다면, 모사 혹은 반복은 대상의 원형(original form)에 접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마찬가지로 Control C, Control V도 비평과는 다르다.


비평과 비평자의 대가 


 실로 비평이란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에서 시작한다면, 비평자는 그 거리만큼 대상에 몰입하지 못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신이란 무엇인가?" 묻기 시작한 신자는 더이상, 이전의 종교생활에서 그러했듯 무작정 신을 찬양할 수 없게 된다. "연애란 무엇인가?" 묻기 시작한 애인은 더이상, 이전과 같이 눈에서 꿀이 질질 흐르는 연애를 할 수 없게 된다. 비평을 작정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면, 느닷없이 슬픈 BGM이 깔리며 인물들이 울어젖혀대는 이른바 신파 장면에서 같이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짜증이 엄습할 것이다. 


 비평의 대가는 이뿐만이 아니다. 비평이 익숙해지고, 비평자가 훈련되면 훈련될수록, 참을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질 것이다. 디저트를 비평하는 데 훈련된다고 해보자. 더이상 설탕 덩어리나 줏어먹으며 기뻐하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와인의 비평을 훈련한다고 해보자. 더이상 편의점에서 만 원짜리 와인에 만족하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정치 비평에 훈련된다고 해보자. 인터넷에 굴러다니는 정치인에 대한 악플과 선플을 보면 참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비평자가 훈련되면 훈련될수록, 대상에 대해 보다 더 섬세한 감각을 갖게 될 것이다. 섬세한 감각을 갖는다는 건 그만큼 대상을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축복임과 동시에, 온갖 드러운 꼴도 섬세하게 봐야만 되는 처절한 대가를 요구한다. 


삶을 비평하는 이들에게


 그러므로 삶을 비평하려는 이가 있다면, 그는 보통 정신머리로는 버티기 힘들지도 모른다. 삶에서 마주하는 희노애락에 몰입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무례하거나 멍청한 사람과 마주치면 오른쪽 뺨과 더불어 왼쪽 뺨도 때리고 싶어질 것이다.  연애를 하더라도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기 어려워질 것이다. 연애 편지를 쓴다면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애인인지 자아성찰로 점철된 편지를 쓰게 될지 모른다. 누군가가 어떤 정치인을 욕하거나 응원하고 있으면 그 옆에서 나직하게 "정치란 무엇인가" 중얼거리다가, 또라이 취급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 비평된 삶은 여전히 꽤 괜찮을 삶일 것이다. 웬만한 사건들은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무례하고 멍청한 사람을 가능한 덜 마주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연애를 한다면 앞으로의 연애가 잘 굴러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할 것이다. 그 사실을 애인이 알아준다면, 듬직한 애인 행세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잘 성찰된 언어로써 연애 편지를 쓴 끝에, 버터를 한 주먹 정도 퍼먹은 듯한 편지는 쓰지 않을 수 있으리라. 정치 문제로 쓸데없이 논쟁을 벌이는 웃어른들을 중재할 수 있으리라.


 몰입하는 이에게는 몰입하는 이 나름의 장단점이 있고, 비평하는 이에게는 비평하는 이 나름의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나는, 느닷없이 눈물을 쏟는 애인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같이 눈물을 쏟아 주는 애인도 그 나름의 감동이 있겠지. 그러기에는 연애와 내가 두고 있는 거리를 무시할 수 없다. 대신 나는  침착하게 손수건과 생수를 건넬 수 있었다.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마저 하자.



이전 02화 이해란 무엇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