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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준 Jun 17. 2023

해석이란 무엇인가?

 : 레토릭 너머를 보는 읽기의 방법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보자. 풋풋한 20대, 철수는 한 살 아래의 영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네가 너무 좋아. 나랑 사귀어 줄래?"

 영희는 다소 놀란듯 눈이 화들짝 커졌다, 이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오빠, 우리 이제 친한 친구로 지내자"


 이 상황에서, 우리 한국어 화자들은 철수와 영희가 더이상 친구로 지낼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철수는 그 마음을 끄집어 영희에게 용기내어 고백했지만, 거절을 당했다. "우리 이제 친한 친구로 지내자" 하는 말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만 놓고 보면, 영희는 적극적으로 철수와 친구가 되어야 한다. 만약 영희가 이 대화 이후로 슬금슬금 철수를 피한다든지, 인사를 했다면 받는둥 마는둥 후다닥 도망치듯 지나간다든지, 문자를 보내면 한 이틀 후에나 답장을 한다든지 한다면, 영희의 "친구가 되자" 라는 발화와는 이율배반적이다. 


 그런데 만약 철수가 자신을 슬금슬금 피하고,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 하고, 문자를 보내면 이틀 후에나 답장을 하기 시작하는 영희에게 빽 소리를 지르며 이렇게 질타한다고 하자.

  "왜 나한테 이렇게 서먹하게 대해? 우리 친구가 되기로 했잖아!"


 어떤 말을 문자 그대로, 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철수의 이 문제제기는 타당하며 정당하다. 친구 하자며? 건강한 친구 관계에서는 서로를 슬금슬금 피하지 않으며, 인사를 건네면 기꺼이 받으며, 문자를 보내면 별 일이 없는 한 가급적 빠르게 답장을 보내준다. 영희가 먼저 제안한 친구관계에, 영희는 대단히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한국어 화자들은 "오빠, 우리 이제 친한 친구로 지내자" 하는 말이 그 레토릭 그대로 친구가 되자는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 철수 같은 문제제기를 한다면, 우리는 영희 쪽이 아니라 철수 쪽을 비난하게 될 것이다. 이런 눈치없는 자식!


 뭔가 '해석'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텍스트를 읽을 때, 텍스트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의외로 제대로 된 해석이 불가할 공산이 크다. 특히 그 해석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가, 우리와는 다른 의미망(web of meanings)에서 작동하고 있을 땐 더더욱. 만약 500년쯤 지나서 한국을 연구하는 연구자가 위의 철수와 영희의 대화를 듣고,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고 하자.

 "21세기 한국에서는 사랑고백을 하고 나면 친구가 되려는 문화가 있었다"

 이 결론이 엉터리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잘 모르는 대상과 접촉할 때에는, 이처럼 엉터리 결론을 내리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우리가 잘 모르는 대상은 그만큼 우리와 단일한 의미망을 공유하지 않을 공산이 크고, 그렇다면 그들의 레토릭을 그들이 의도했던 대로 해석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온전한 이해 내지는 해석을 위해서는 그 대상의 세계에 접속해야 한다. 그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들이 관습적으로 활용하는 언어 세계에 접속하는 것이 그 방법일 수 있다. 그러려면 말 한두마디를 듣고 간단히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조금 더 신중한 태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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