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놈은, 이해할 수 없다.
"허무를 음미하다 보면, 도대체가 문제가 뭘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제가 있으면 뭐가 문제인지 따지고 고쳐야 할 텐데. 대부분의 문제들의 문제는, 문제가 무엇인지조차도 특정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너무 복잡한 문제들이 엮인 채, 도대체 내가 풀어낼 수 없을 정도로 골치 아파지는 순간이 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탓에 풀어낼 수 없다. 풀어낼 수 없는 탓에 이해할 수 없다. 이해란 모래 위에 간신히 쌓아 올린 동전 탑인가 보다. 내 세계에서는 1+1은 2다. 모두의 세계에서, 각각 저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다. 내가 묻는다. “일 더하기 일은?” 답하길, 3이나 4라고 답한다. 이런 사람들이랑은 이야기할 수 있다. “왜?”라고 물어볼 의지가 샘솟는다. 그리고 맞추어 나갈 수 있다. 간신히 이해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가끔, 일 더하기 일이 뭐냐고 물었는데 거북선이라든지, 에펠탑이라든지 엉뚱한 답을 내놓는 사람들이 있다. 이럴 때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도대체가 이 사람은 ‘1’이 의미하는 게 뭔지 알기나 할까? 도대체가 이 사람은 ‘더하기’가 뭘 의미하는지 알기나 할까? 도대체가 이 사람은 ‘=’이 의미하는 게 뭔지 알기나 할까? 단지 상대방이 내려놓은 ‘거북선’ 한 마디에, 이런 질문들이 내 전두엽을 타격한다. 그러니 한숨 한 번 푹 쉬고,
'그래, 네 말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
- 문집《허무를 먹다》(2022) 中.
이를테면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보자. 애인이 있는데도 다른 여/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사람이 있다. 외도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애인은 그 여/남자에게 따져 말한다. "그 년/놈 얼굴이나 한 번 보자!" 사진첩에서 꺼낸 외도 상대의 얼굴은, 도저히 미녀/남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얼굴이다.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픽 내쉬며 이렇게 말한다. "이해가 안 되네.."
'이해'의 두 가지 차원
우리는 왜 이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을까? 이유는 명료하다. 첫째, 도덕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없다. 이른바 '정상적인' 도덕관념과 일부일처제 사회의 관습을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이라면, 애인을 두고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는 일을 이해할 수 없다. 으레, 바람을 피우는 놈도 바람피우는 게 도덕적으로 그르다는 걸 알면서도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도덕관념을 비롯한 사회적 관습은 널리 공유되어 있기에, 그걸 어기는 사람조차도 그 관습을 받아들이고 있으리라고 가정된다. 그리고 그 가정은 대체로 참이다. 만약 바람피우는 건 나쁘다는 도덕관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천진난만하게 애인에게 진즉 말했을 것이다. "나 요즘 새로 만나는 여/남자가 있다?"
둘째, 인센티브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외도는 사회적으로나 현재의 애인에게나 비난받을 위험을 진다. 비난받을 잠재적인, 그리고 실재적인 위험을 외도의 비용으로 본다면, 외도를 통해 얻(을 것으로 기대되)는 이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익이 비용보다 크다면, 도덕적 판단과는 무관하게, 외도의 유인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외도 상대가 절세미녀/남이었다면, 펄펄 끓는 분노가 조금 사그라들며 어느새 상대의 외도를 납득할지도 모른다. "아.. 이 정도 얼굴이면 어쩔 수 없지." 그러나 위 상황에서는 외도의 이익보다는 비용이 훨씬 커 보인다.
이해할 수 없는 놈을 만났을 때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놈들을 만났을 때, 대개 우리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화를 낸다. "이런 우라질 놈! 쓰레기! 빌어먹을 놈! 저 상놈새끼!" 이해할 수 없는 놈은 마치 자연재해와 같다. 주변에 막대한 물질적/정신적 피해를 입히지만, 특별히 목적을 갖고 그러는 건 아니다. 자동차와 집을 부술 목적의 지진 같은 건 없다. 마찬가지로 애인을 '빡치게' 할 목적으로 외도를 할 사람은 없다. 자연재해가 대개 그냥 벌어지듯, 이해할 수 없는 놈들도 이해할 수 없는 짓을 그냥 한다. "저 자식 왜 저러지?" 하며 답답함에 호소해 봐도 들을 수 있는 답변은 희박하다. "그냥."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대개 이해할 수 없는 놈들을 마주치면 이해를 포기하고 화를 내기 시작한다. 그 반응,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상한 놈을 마주치면 단지 욕이나 퍼부으며 저주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꽤 괜찮은 처방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간단하게 이해해 보는 것이다. "어쩌면 저 자식이 멍청해서 저러는 건 아닐까?"하고.
저 자식이 멍청해서 저러는 게 아닐까 하고 간단하게 설명해놓고 나면, 실로 그것은 진정한 이해는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어쩌면 그 외도 상대에게 그 추잡한 외모로는 알 수 없는 마성의 매력이 무엇인지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하면 또다시 질문이 쇄도한다. 그게 도대체 뭔데? 어쩌면 엄청난 봉사정신의 소유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하면 다시 질문이 뒤따른다. 그러면 봉사정신이 일부일처제와 애인에 대한 도덕관념보다 중요하다고? 어떤 봉사정신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하면 다시 질문이 뒤따른다...
진정한 이해를 위한 무한의 질문-답변을 하는 대신, "멍청해서 저래" 하고 단출하게 이해하면, 머릿속이 개운해진다. 마치 급똥으로 종횡무진하다가 가까스로 화장실을 발견한 기분이랄까. 머릿속을 헤집던 수많은 "왜?" 들은 이내 "멍청해서 저래"라는 단말마와 함께 시원하게 배설될 것이다.
꼭 오물을 삼키고 소화해 보기를 시도해야 오물에는 영양가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방법을 시도 때도 없이 활용하지는 않을 것을 권한다. 그랬다가는 자칫 영혼이 빈곤해질 수 있다. 이해하기 힘든 대상이 나타날 때마다 "이건 이래서 이래" "저건 저래서 저래" 하며 단순하게 설명해 버린다면, 꼭꼭 씹어 넘겨 소화해야 할 대상도 모두 시원하게 물똥으로 넘겨버리는 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설사로 인해 영양소를 적절히 섭취하지 않으면 육신이 빈약해지듯, 이해의 대상을 물똥 삼아 대충 설명해 버리면 정신이 빈약해질 것이다.
같은 이유로 위 방법을 활용할 때에는 굳이 당사자 앞에서 하지는 않기를 권한다. 급똥으로 답답한 아랫배를 가라앉힌 건 좋지만 그걸 굳이 상대방에게 뿌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면밀한 노력 없이 이해를 자처한 설명은, 영양가가 없다는 점에서 배설물과 다름없다. 그러니 굳이 면전에 대고 오물을 뿌리는 일은 지양하도록 하자.
내가 권하는 방법은 아래와 같다. 이해하기 어려운 놈을 만나거든, 최대한 이해하려고 시도해 보라. 저 놈이 저러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 그 이유만 알게 된다면 이 답답한 마음도 조금은 해소될 거야, 하고. 그러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땐,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나직이 중얼거리자. 이런 바보 같은 놈,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