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를 이기는 법

<19년 살아본 보고서> 8. 살아가는 법에 대하여 - 10

by 문현호

'영재고'라고도 불리는 경기과학고등학교에서 2학년이 된 저는 낮은 성적 문제와 애착 불안 문제를 동시에 마주했습니다. 자존감은 무너지고, 마음의 안식처는 무너졌으며, 심한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8장 '살아가는 법에 대하여'에서는 제가 그 우울증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 어떻게 자존감과 행동력을 되찾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트라우마 정공법: 미적분

저는 COVID-19, 일기, 그리고 퀵 윈 과제라는 세 가지 열쇠를 통해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두려움이 만든 우울은 이 세 가지 열쇠를 만나 거의 사라졌어요. 그 빈 자리는 자잘한 성취감이 쌓여 만들어진 ‘할 수 있다’로 차오르고 있었죠. 그건 자신의 성장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것만으로도 강력했습니다. 원래는 미래의 일들을 처리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면, 이제는 웬만한 일이라면 다른 사람들만큼, 혹은 그들보다 더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조금씩 강해졌어요. 성장에 대한 믿음은 옛날에 못 한 일이라도 나중에는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원래는 두렵게 느껴졌던 미래가 더 밝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때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없다’고 두려워하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복잡한 미적분이었습니다. 1학년 2학기의 처참한 미적분 성적, 그리고 그 결과로 변한 주변 분위기와 사라진 기회들이 제가 가진 가장 큰 상처였고, 제 우울의 근원이었어요. 저는 미적분만큼은 정말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그 미적분은 앞으로 수많은 과학 법칙에서 등장할 텐데, 저는 앞으로도 미적분 실력이 부족할 테니 그때 큰 실패를 겪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미적분이라는 존재는 제게 우울이자 트라우마였습니다.

앞에서 만들어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점점 강해져, 마지막으로 이 미적분에 대한 두려움과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전반적으로 수학적 사고력이 학교의 다른 친구들에 비해 부족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제가 미적분을 평생 못할까요? 성장을 믿기 시작한 제게 미적분 심화 문제라는 고정 과제는 갑자기 쉬워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장은 못 풀겠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될 거에요. 미적분이 심화라고 해봐야 고등학교 수준인데, 얼마나 어렵겠어요. 친구들도 했는데, 저도 조금 더 노력하면 그 정도 미적분 문제는 풀 수 있을 겁니다. 저도 경기과학고 학생인데,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을 거에요.

그래서 저는 미적분 과목의 가장 어려운 문제집, ‘블랙라벨 미적분 2’를 준비했습니다. 문제집은 꽤 얇았어요. 문제는 어렵지만 내용은 그렇게 많지 않았죠. 열댓 개의 단원, 500여 개의 문제가 전부였습니다. 기초적인 내용 설명도 간단히 들어있어서, 따로 강의를 찾지 않아도 바로 풀어볼 수 있었고요.


제 기억이 맞다면 저는 첫 날에 바로 한 단원을 다 풀었습니다. 범위는 미분의 심화 개념이었고, 문제들이 같은 규칙을 반복하면 풀 수 있다 보니 딱히 어렵지 않았어요. 그렇게 그 문제집을 다 푸는 데에 대충 20일 정도가 걸렸습니다. 마지막 적분법의 꼬인 문제들을 제외하면 크게 어려운 문제도 없었고요.

재밌는 것은 문제집에 제가 2학기 때 제대로 풀지도 못 했던 경기과학고 수학 시험 문제와 ‘똑같은 문제’가 몇 개 있었다는 겁니다(그 문제집은 수학 과목의 부교재였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이걸 다 풀었다는 건, 그때 못 풀었던 시험 문제도 다 풀 수 있다는 것과 같아요.

젠장, 저는 그 미적분도 할 수 있었어요.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연전연승을 이어가며 점점 강해졌습니다.

미적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지고 있던 상처와 트라우마가 씻겨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1학년 2학기 성적 때문에 가지고 있던 불안과 우울에서 벗어났어요. 다음 학기 성적은, 솔직히 그렇게까지 낮게 나오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연습하기만 하면 저는 다음 수학 수업들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여기서 저는 제가 1학년 2학기 성적이 낮았던 두 번째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건 학습 방법이 틀렸기 때문이었어요. 저는 수학과 물리 과목 모두 다른 과목들처럼 개념을 기억하기 위해 요약노트를 만드는 방법으로 학습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과목은 이 방법이 옳은 학습 방법이 아니었어요.
수학과 물리처럼 ‘직관’을 기반으로 복잡한 상황을 해결하는 문제들은, 원래 단순히 공식만을 외운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공식을 몇 가지 완벽하게 외운다고 해서, 어떤 상황에서 어느 방향에 축을 설정하고 어느 공식을 써야 할 지 바로 알 수는 없으니까요. 이런 과목들은 오히려 비슷한 문제를 많이 풀어보면서 공식을 ‘몸에 익히며’ 직관을 얻어야 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체감한 이후부터 수학 과목의 시험이 있다면 ‘비슷한 문제를 최대한 풀어보는 방식’으로 준비했습니다. 물론 이미 경험이 많은 친구들을 따라잡기는 어려웠어요. 대신 적어도 그렇게 언젠가 쓰일 새로운 지식과 직관을 얻어가는 데에만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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