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건네준 시간~29화
그리움으로 가는 시간~구절초
들판에서 산길로 접어드는 길목이었다.
초저녁의 공기가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고, 길가에는 구절초가 넓게 무리를 이루어 피어 있었다. 언뜻 분홍빛이 섞인 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하얀 구절초였다.
처음 필 때는 수줍게 분홍빛을 띠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속을 다 비워낸 듯 하얗게 변해가는 꽃잎들. 그 변화가 꼭 누군가를 오랫동안 묵묵히 기다려온 마음의 색깔 같았다.
서둘러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시간이 지나야 만 비워지고 맑아지는 마음처럼 노란 꽃술을 중심으로 가느다란 꽃잎들이 둥글게 퍼져 있었다.
자세히 보면 꽃잎 하나하나가 그리 크지 않은데, 그 작은 꽃들이 모여 들판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들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마치 하얀 물결이 천천히 일렁이는 것 같았다.
그 물결 속에서 알싸하고 쌉싸름한 들국화 향이 묻어왔다. 코끝을 스치는 그 향기는 잊고 지냈던 오래된 기억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 세우는 것만 같았다. 그 이름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마음 어딘가가 먼저 알아보는 그런 기억이었다.
구절초는 화려한 꽃이 아니다. 누군가 일부러 심어 놓지 않아도 길가나 논둑, 들판 어디에서나 제 자리를 지킨다. 그래서인지 더 오래 바라보게 되는 꽃이다.
아홉 마디가 다 차오르는 가을날에야 비로소 꽃을 피운다는 그 이름처럼, 어쩌면 그리움도 무르익을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너무 이른 그리움은 마음을 아프게만 하지만, 시간을 건너온 그리움은 조금 더 조용해지고 조금 더 깊어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구절초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리운 사람을 마음껏 그리워해도 되는 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을이라는 계절은 우리 마음속에 깊이 가라앉아 있던 기억들을 조용히 흔들어 깨우는 시간이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석양이 들판 위로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처음 볼 때는 그저 하얀 꽃이라고 생각했는데, 석양빛을 머금은 구절초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하얀 꽃잎 사이로 따뜻한 빛이 스며들고,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들판 전체가 은은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 들판의 시간도 함께 느려지는 것 같았다. 흘러가고 있던 시간들이 잠시 멈춰 서서 지금 이 순간을 오래 바라보게 하는 것처럼.
나는 한참 동안 그 꽃들 곁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때 문득 알게 되었다.
가을이라는 시간도, 내가 품고 있던 그리움의 무게도, 구절초처럼 소리 없이 깊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고요한 자리로 옮겨 앉는 일이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저물어가는 들판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리움이 머물러도 괜찮다고, 이 계절이 조용히 허락해 주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