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건네준 시간~28화
멈춰진 시간 속의 영원성~ 드라이플라워
지금껏 피어나는 꽃들의 생동감에 대해 이야기해 왔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시선으로 꽃을 보려 한다. 생명력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겨진 단단한 흔적, 드라이플라워에 관한 이야기다.
꽃꽂이를 하던 시절로 잠시 돌아가본다. 꽃을 만지는 시간은 늘 즐거웠다. 줄기를 다듬고 화병에 물을 채우고, 꽃의 방향을 조금씩 고쳐 놓다 보면 어지럽던 마음도 함께 정돈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꽃을 만지다 보면 언제나 마음 쓰이는 일이 있었다.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이 며칠 지나지 않아 하나 둘 시들어버리는 모습이었다. 화병 속에서 조금씩 고개를 떨구는 꽃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 아름다움을 조금 더 곁에 둘 수는 없을까. 그래서 꽃이 완전히 시들기 전에 줄기를 묶어 거꾸로 매달아 두곤 했다. 똑바로 말리면 꽃잎이 축 쳐져서 말렸을 때 모양이 이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의 시간은 모두 앞을 향해 흐르는데, 그늘진 창가에 거꾸로 매달린 꽃들은 시간이 멈춘 듯 보였다. 바람이 드나드는 길목에서 꽃은 서서히 물기를 잃으며 다른 모습으로 남는다.
이 과정을 지켜보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살아있는 것만이 꽃의 전부일까. 화려한 생기가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며 시간을 견뎌내는 존재를 마주하며, 나는 아름다움의 또 다른 얼굴을 보았다.
생기를 품었던 수분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대신 단단한 사유가 채워진다. 꽃잎의 색은 조금 바래고 모양도 처음과는 달라지지만, 그 꽃이 통과해 온 시간은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고 그 결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것은 가장 고운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두듯, 꽃의 시간을 잠시 붙잡아 두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꽃을 마주한 순간의 기억과 감정을 오래도록 머물게 해주는 따뜻한 오브제가 되어주기도 한다.
특히 안개꽃은 말려도 거의 모습이 변하지 않는다. 작은 별처럼 흩어져 있던 꽃송이들이 시간이 지나도 그 자리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안개꽃을 말려 두면 꽃이 시든 것이라기보다, 시간이 그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코를 가까이 대면 느껴지는 바스락거리는 마른풀 향기는 오래된 편지 봉투에서 나는 냄새를 닮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에도 꽃을 말려 본 기억이 있다. 예쁘게 핀 꽃잎을 따서 두꺼운 책 사이에 살며시 끼워 두었다. 책장을 덮을 때 꽃잎이 부서지지 않을까 괜히 조심스럽기도 했다. 시간이 지난 뒤 책을 열어 보면 납작하게 마른 꽃잎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 꽃잎을 코팅지 사이에 넣어 작은 책갈피를 만들고, 짧은 글귀를 적어 친구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때는 그저 꽃을 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나만의 방식으로 소중한 시간을 박제하는 일이었다. 꽃은 이미 시들어 사라졌지만, 그 꽃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과 그 계절의 공기는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있으니까.
드라이플라워를 바라보고 있으면 꽃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시간이 그 안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화려한 생기는 잃었을지언정,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으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 꽃은 이미 말랐지만 꽃을 만질 때 그 모습은 여전히 내 마음에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