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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샘 Oct 11. 2024

16. 다시 묻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나를 알고, 나로 살기

가깝고도 먼


서양 속담에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두뇌에서 심장까지의 거리’라는 말이 있단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꼬집는 말일 것이다.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알면 사랑하게 된다'라고 했고, 심리학자 박상미 교수는 '알면 사랑하기 쉽다'라고 했다. 모두 앎을 사랑과 연결 지었다.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사랑의 대상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이 그 무엇이든 앎이 그것을 더 쉽게 사랑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을 이야기한다. 내 존재의 근원이자 세상 가장 편한 보금자리가 가족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가족을 사랑하는 일은 특별하지 않다. 한시도 쉬지 않고 숨을 쉬어도 공기가 있다는 걸 잊고 살듯, 가족도 익숙함만큼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기 어렵다. 너무 익숙해서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어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애쓰지 않아도 괜찮은 유일한 관계가 가족이라 생각했다. 착각이다.


머리와 가슴까지의 거리처럼 가족 사이의 거리도 가깝고도 멀다.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잘 모른다. 부모 자식 간, 부부 간에도 공부가 필요하다. 그 앎으로 아프지 않게 사랑할 수 있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오히려 더 상처를 주고, 알려고 애쓰지 않아서 오해하고 상처받는 것이 가족이다. 생각해 보면 가족들이 공유하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각자 자기만의 세상을 겪는다. 내가 밖에서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 가족들은 잘 모른다. 역할이 많아질수록 내 페르소나도 다양해진다. 가족이 아는 것은 집에서의 내 모습뿐이다. 


자식으로도 살아보고, 배우자로도 살아보고, 부모로도 살아보고 있다. 부모 그늘 아래에서 클 때는 몰랐던 것을 나이가 들면서 깨닫게 된다. 부모의 삶이 한 사람의 인생으로 느껴질 때 어른이 된다고 한다. 내 부모가 살아온 날들을 알게 되니 당신들의 삶이 보였다. 내 부모도 자식이었을 때 더 살뜰한 보살핌을 받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음을 알고 나니, 당신들의 사랑이 서툴고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기는 해도 진심임을 깨달았다. 엄마가 되고 나서 하나를 더 알았다. 부모님의 사랑이 서툰 것이 아니라 자식이었던 내 마음이 이기적이었다는 걸 말이다. 세상살이 어려운 줄도 모르고 내 마음에만 흡족한 부모이길 바랐던 어린 내가 철이 없었다. 그렇게 배우고 깨우치며 살아간다. 


자식으로 살아봤으니 내 아이들의 마음도 알 것 같아 어른 행세를 한다. '같은 뱃속에서 나왔는데 어쩜 이리 다르냐'던 부모님 말씀이 틀리지 않음을 자식 키우면서 알았다. 내 뱃속에서 똑같이 열 달을 키웠어도 자식들은 서로 다르고, 나와도 다르다. 그러니 내 어린 시절 생각으로 그들을 예단할 수 없다. 제일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가 누구인지, 어떤 때 학교에 가기 싫은 마음이 드는지 알 것 같지만 물어야 한다. 알아갈수록 내 부모도, 자식도 더 잘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가장 어려운 것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배우자다. 각자 자신의 앎에만 기대어 서로를 대하면 여지없이 삐걱거린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은 서로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물어야 한다. 부부간에 대화가 필요한 이유다. 간혹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하는 대화가 싸움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신혼 초엔 전투적이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서로를 알게 되면 내 마음이 가벼워지는 때가 온다. 어느 지점에서 화가 나고 상처를 받는지 알게 되면 적당한 선에서 서로 타협하고 살게 된다. 타협은 양보와 배려의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포기나 체념이 아니어야 건강한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 가족 상담실에서 들을 수 있는 조언처럼 늘 지혜롭게만 대처하면 좋겠지만 현실이 늘 아름답지는 않다. 부모 자식 간이든 부부 간이든 싸우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그러면서 닮아간다.



아는 것에 머물지 않기


가족 간에 싸워도 괜찮다. 싸우는 게 당연한 거라고, 안 싸운다는 건 대화가 없는 거라고, 덜 싸우는 가족이 행복한 가족이라고 박상미 교수가 격려한다. '열린 대화하기, 판단과 충고하지 않기, 싸우기 전에 용기 있게 감정 이야기하기, 공감하고 위로하기, 칭찬하기.' 이것이 가족 간에 소통하는 방법이라고 알려준다. 이걸 알았으니 이제 쉽게 사랑할 수 있을까?     



모든 생명체는 행동으로 자식을 가르치는데, 지구상에 한 생명체만 입으로 자녀를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 생명체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바로 인간입니다. 나는 혹시 말로만, 입으로만, 너무 많은 잔소리로만 내 자녀를 키우고 있는 건 아닐까 한번 점검해 보세요. 행동으로 자식을 가르칠 때 내 자녀는 나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박상미의 가족 상담소>, p.91.)     



백 마디 말보다 행동으로 자식을 가르치란다. 결국 가르치기 전에 내가 바로 서야 한다는 말이다. 내 배 아파 낳은 가장 가까운 혈육을 대하는데도 그러하거늘, 남과의 관계에서는 말해 무엇할까. 모든 관계 이전에 내가 올바르게 서고, 스스로를 돌보며 살아야 한다. 


지금까지 이걸 몰라서 그리 살지 못한 건 아니다. 학창 시절 시험지를 받아 들고서야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단편적이고 희미한 기억이었는지 깨닫는 것처럼, 살아가는 방법도 사랑하는 방법도 머리와 입으로 아는 건 진짜 앎이 아니다.  


어릴 때 그렇게 이쁘던 아이가 어디 가고 사춘기가 되면 딴사람이 되더라도, 듬직하고 덤덤하던 남편이 감성 충만한 중년 아저씨가 되어 잘 삐쳐도, 그것이 건강한 변화임을 알아야 한다. 공부에 끝이 없다더니 정말 그렇다. 행복한 가족을 꿈꾼다면 끝없이 가족에 대해, 내 말과 행동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앎은 자기밖에 모르는 철부지를 키우고, 가족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하게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확장시키는 힘이다. 앎과 삶은 그렇게 글자 모양처럼 닮았다.     



죽음을 알면


그렇다면 죽음을 안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죽음을 철학적, 종교적, 과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그 깊이와 넓이는 끝이 없다.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처럼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 세밀하게 죽음을 공부할 수도 있고,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같은 문학 작품을 통해 필연적으로 겪을 죽음을 향한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접할 수도 있다. 그런 책들 속에서 내 삶과 닮은 인물이 있다면 더없이 반갑다. 죽음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 먼저 겪거나 고민한 이들의 기록을 통해 죽음을 알 수 있다. 


그 배움을 통해 삶의 끝이 있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게 되면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선택과 행동은 달라진다. 죽음에 대해 아무리 아는 게 많아도 여전히 죽음이 두렵지만, 다행히 지금은 죽음을 마주한 것이 아니다. 곧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깨달으면 늦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이라는 말은 언제나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두고 나오는 후회와 탄식이다. 죽음 직전이 아니라 지금 죽음의 두려움을 느껴보는 경험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사고나 병을 얻어 죽을 위기에 처하지 않은 지금, 죽음의 두려움을 느껴보는 경험이 나를 변화시킨다.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면 어떤 기준으로 내 행동을 선택할지, 그 선택의 결과가 내 삶의 질을 얼마나 높일 수 있을지, 죽음을 전제로 일상을 살면 신중할 수밖에 없다. 이왕이면 후회가 적은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게 된다. 나중의 행복을 위해 지금을 희생하지 않는다. 아이들 다 키우고 나면 나를 돌보며 살겠다는 것은 지금의 행복을 유예시키는 헛된 희망이다. 지금 나를 돌보는 것이 행복이고, 내 행복이 아이를 행복하게 만든다. 죽음을 안다는 것은 잘 죽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현재를 잘 사는 법이기도 하다.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만족자 satisfizers'와 '최대자 maximizers'입니다. 최대자는 항상  최고의 선택을 내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만족자는 "충분히 괜찮아"라고 말합니다. (...) 인간이 겪는 고통의 대부분은 95퍼센트의 좋은 삶을 살면서도 나머지 5퍼센트를 달성하려고 할 때 생깁니다.

우리는 결국 추구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돈을 원하는 사람들은 돈을 얻기 쉽습니다. 향락적 즐거움, 모험 혹은 사랑을 찾는 사람들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유머를 찾는 사람들은 유머를 찾습니다. 골칫거리를  찾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마음먹은 만큼 행복해집니다. (...)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하지만 내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단다."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 메리 파이퍼, p.237)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가? 지금 얻은 것이 당신이 원하는 것인가?

 중요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면 삶에 응집력이 생긴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삶의 의미나 목표가 되면 많은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도 덜 방황한다. 나아가야 할 방향이 선명해질수록 생각은 단순하되 명확해지고, 간결해진 마음자리 한 편에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혼자 사는 인생이 아니다. 내 코가 석 자일 때는 보이지 않던 가족과 친구, 친밀함을 넘어선 다른 사람과 세상에 관심이 생긴다. 그 관심이 앎이 되고 사랑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삶의 반경이 넓어진다. 


죽음을 인식하면 유한한 삶이 보이고, 제한된 시간 안에서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가 분명해진다.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은 변화와 성장을 지향하게 되고, 지금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 삶의 질이 높을수록 죽는 순간 후회와 아쉬움이 덜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두려움 대신 삶을 정리하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삶과 죽음이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알고, 그 앎을 삶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다시 묻는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 


잘 살고 싶다면, 어떤 삶이 좋은이 알아야 한다. 알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 공부하는 삶은 앎을 확장시키고, 그 앎이 삶을 이끈다. 앎은 그렇게 증식하면서 연결된다. 저기서 본 것이 여기서도 보인다. 어느 순간,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작은 깨우침이 생긴다. 먹고, 자고, 일하고, 쉬고, 사랑하는 나의 삶이 가족과 타인과 자연과 세상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생각이 커지다가 나는 그만, 아주 작고 작은 우주의 먼지 하나가 된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과거는 존재하지 않아요. 미래도 존재하지 않아요. 오로지 현재만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인가 흘러가는 실체, 즉 시간이 있고 심지어 그것을 느낀다고 착각해요. 바로 기억 때문이에요. 과거를 기억하니까 그 결과로 과거-현재-미래의 흐름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변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나입니다. (<살아보니, 시간>, 이권우, 이명헌, 이정모, 김상욱, 생각의 힘, 2023, p.39.)



도서평론가, 생화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뇌과학자, 과학철학자가 모여 지적 수다를 떠는 '살아보니' 책 시리즈가 있다. 시간, 지능, 진화. 세 가지 주제로 '알쓸신잡' 같은 류의 이야기를 하는 대담집이다. 시간 시리즈의 한 대목을 읽으며 나는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지 다시 생각해 본다.

후회 가득한 기억을 안고 사는 나, 미래를 걱정하는 나는 실체가 없다. 내 생각의 흐름 속에서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하고 있는 지금의 나'이다. 지금 나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가? 지금 나는 어떤 감정을 느끼며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고 있는가? 


이어지는 질문들이 마음을 흐트러뜨린다. 그러고 나서 하나의 문장을 만난다. 나는 나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앎을 내 삶으로 실현해야 한다. 그 순간들이 과거의 나였고, 지금의 나이고, 앞으로의 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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