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살아가기
완벽주의를 대하는 자세
나는 ‘어설픈 완벽주의자’다. 나에게 완벽주의는 빈틈없는 완벽함이 아니라, 잘하고 싶은 마음이다. 잘해서 남에게 인정도 받고 싶고, 지나고 나서 후회도 덜 하고 싶고,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싶기도 하다. 남들이 잘했다고 인정해도 아쉬움이 남으면 내 기준에 완벽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완벽함의 기준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 완벽하고 싶은 마음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내 능력을 확인하고 인정받으면서 자부심을 느끼고 싶은 마음은 나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완벽주의자에게는 늘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바로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 완벽주의를 재정의하면서 어설프다는 수식어를 빼놓지 않는다.
가끔 완벽주의를 버려야 할 성향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 완벽주의가 나쁜 것은 아니다. 누구든 잘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고, 또 뭐든 잘하면 좋지 않은가. 잘해서 얻은 결과로 남들도, 나도 좋은 것을 누리면 더할 나위 없다. 완벽주의가 버려야 할 강박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목표 달성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무엇을 원하는가? 어떻게 그것을 이루었다고 판단하는가?
목표와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은 사람마다 방식이 다르다. 또한 목표를 이루었는지 확인하고 그 결과에 대해 평가하는 태도도 사람마다 다르다. '이만하면 괜찮다'며 평범함에서 충분히 만족한다면 자신을 완벽주의자라 칭하지 않는다. 완벽주의자는 노력한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해 스스로에게 좀 까다롭다. 나에게 비추어보면 자기 검열이 강할수록 완벽주의 기질을 버리고 싶어 진다. 그러니 완벽주의는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든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의 강박적인 태도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완벽주의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그럭저럭 살고 싶지 않다면 당신이 옳은 겁니다>(캐서린 모건 셰플러 지음, 박선령 옮김, 쌤앤파커스, 2023)에서는 완벽주의를 5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열정형 완벽주의자, 전형적 완벽주의자, 낭만형 완벽주의자, 게으른 완벽주의자, 난잡형 완벽주의자. 아 잠깐, 유형 이름만으로 서열을 매기지는 말자.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완벽주의자라면 자기도 모르게 저 이름만으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을 게 뻔하다. 이왕이면 자기가 '게으른'이나 '난잡형'보다 '열정형'이나 '낭만형'처럼 어감이 좋은 수식어가 붙은 유형이길 바라면서. 내가 그랬다.
그럭저럭 살고 싶지 않다면
다섯 가지 유형 중 좋고 나쁜 것은 없다. 애초에 뭐든 잘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완벽주의자를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각 유형에 대해 궁금함이 일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책 서두에 간단한 질문들이 있어 자신의 완벽주의 유형을 파악할 수 있다. 성격에는 좋고 나쁜 게 없다지만 이왕이면 좋은 사람처럼 여겨지는 결과를 받고 싶은 심리 테스트처럼, 완벽주의 유형 테스트도 사람을 묘하게 긴장시킨다. 자기 보고식 문항 테스트를 맹신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럭저럭' 살다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다들 원하는 바가 있고, 그것을 이루고 싶고, 자기 나름의 성공을 바라고 살지 않나? 그러기 위해 일상을 관리하고 자기 계발에 힘을 쏟고, 더 배우고 성장하려고 하지 않나? 그게 당연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까?
당신이 완벽주의자라면, 더 나은 삶을 바라며 새벽 기상을 하고, 운동과 독서에 매진하고, 무기력에 빠질 때마다 자기 계발서를 읽었을지도 모른다. 엄격한 자기 검열로 늘 준비가 부족한 것 같아 꿈꾸는 삶에 다가서기를 망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수를 줄이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도 불안한 마음에 자꾸 확인하기도 할 것이다. 일상의 루틴을 방해받기 싫어하고 즉흥적인 약속을 싫어하거나 변화를 싫어할 수도 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열심히 살고 있다며 스스로 뿌듯해 하지만 그 감정마저 남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겸손하게 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비슷한 유형의 완벽주의자다. 나는 전형적 완벽주의자와 게으른 완벽주의자의 모습을 모두 가진 사람이다.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남편은 늘 나더러 '구멍'이 많다고 한다. 잘 까먹고, 실수해도 뻔뻔하고, 현실 감각 없이 이상에 치우쳐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산다고 말한다. 내가 뭘 해볼까 하면, 사기나 당하지 말라며 만류한다. 걱정이 앞서 잔소리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깥에서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신중하고 똑 부러지고 논리적이고 고지식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너무 다른 사람 같은 모습이 나에게 모두 있다.
소심해서 프로 계획러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신중하고 합리적인 사람으로 본다. 실은 그렇게 보이려고 애쓰고 살았다. 그러나 남편은 안다. 십수 년을 같이 살았으니 뻔히 보였을 거다. 구멍이 많은 내 모습도, 합리적이고 고지식한 내 모습도 모두 나다. 몇십 년 살아보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남들에게는 아직 점잖을 빼고 완벽해 보이도록 애쓰지만, 남편에게는 허술한 면이 많아도 뻔뻔하고 당당하다. 내 민낯을 보여도 괜찮은 가족이 있어서 마음에 힘을 빼고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피로를 회복한다. 그럭저럭 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지칠 때 책으로 이해받고, 가족 안에서 쉬어 간다.
누구나 외로움을 지고 산다
그러나 아무리 편한 가족이 있어도 완벽주의자는 종종 인생이 외롭다고 느낀다. 쉽게 만족하기 어려워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부족한 자신에게 실망하는지 모를 일이다. 완벽함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더 잘하려고 애쓰는 자신이 안쓰럽다. 그렇다고 성장하고 싶은 욕구를 폄하할 필요도 없다. 완벽주의를 버릴 필요는 없지만, 그 때문에 다스릴 수 없는 불안과 걱정으로 상처받고 괴롭다면 시선을 좀 더 확대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이해와 공감을 받고 싶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럭저럭 살기는 싫고, 더 잘 살고 싶은데 자꾸 부족한 것 같고 더 성장해야 할 것 같다면 완벽주의의 늪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혹시 그런 삶이 지치고 그런 자신이 마음에 안 든다면, 또 다른 책을 한 권 추천한다.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메리 파이퍼 지음, 안진희 옮김, 위고, 2019)라는 책이다. 임상심리학자인 저자의 이야기를 가만히 읽다 보면 '그럭저럭 산다'는 보통의 삶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깨닫고 저절로 마음이 편해진다.
한 인간이 처한 상황은 다채롭고, 다면적이고, 특별합니다. 하나의 방식이 모든 경우에 다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건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라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방법이 아니면 절대 안 돼'라고 생각하면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
저는 문제에 '복잡하다'는 이름표를 붙이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이 접근법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담자들은 자신이 대충 범주화되어 분류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낍니다. 이 방법은 자신의 상황이 복잡하다고 설명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만약 문제가 간단하다고 느꼈다면 내담자들이 심리치료를 받으러 올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일방적인 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복잡하다'라는 단어는 시간과 공간을 벌어줍니다. 상황을 깊이 분석하여 새롭고 놀라운 진실을 알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 메리 파이퍼, pp.45-46)
완벽주의의 문제는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세상에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없다. 우리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이미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은 그 자체로 이미 평범하여 비범하지만,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복잡한 삶의 일부분이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많은 문제들은 눈앞에 있을 때는 인생을 흔드는 심각한 일 같아 보여도, 지나고 나면 혹은 한 발짝만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러니 '내 인생이 문제 하나 없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적 태도가 아니라, '살면서 이런 일도 겪을 수 있네' 하는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그럭저럭 살고 싶지 않다고 해서 완벽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완벽주의자라 해도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자기만족의 척도를 항상 최고에 둘 필요는 없다. 어떤 삶을 사느냐는 자신의 생각과 태도에서 비롯된다. 완벽주의자를 분류하는 책으로 나를 인정하고 이해한 뒤에, 어느 친절한 심리치료사의 따뜻한 이야기로 복잡하게 얽힌 내 삶을 긍정하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앎'과 '삶'을 겹쳐서 살기
살면서 많은 문제에 봉착한다. 삶은 복잡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사실 단순하다. 자기 안에 답이 있는 경우도 많다. 너무나 익숙해서 답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뻔한 '앎'이 실은 '삶'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자꾸만 더 나은 답을 찾아 헤맨다.
행복은 좋은 선택들을 내릴 때 찾아옵니다. 또한 성실함, 에너지, 인내, 용기 모두 행복에 기여하는 요소들입니다. 다시 말해, 행복은 성격, 일, 건강, 인간관계 모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까지 읽고 "이미 다 알고 있어요"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의 문화는 행복에 관해서 항상 우리를 잘못 인도했습니다. (...)
우리는 그런 문화에 반기를 들고 내담자들에게 '더없는 행복'보다는 자기만족과 인생의 목표를 찾으라고 권유할 수 있습니다. 더없는 행복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일이 더 이루기 쉽습니다.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 메리 파이퍼, p.100)
줄을 긋고 싶은 부분이 너무나 많은 메리 파이퍼의 책 속에서 더 나은 답을 찾아 헤매는 욕심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삶으로부터 떨어뜨린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질 나쁜 음식이나 과식으로 몸을 해치고, 잠과 휴식을 줄여서 무언가에 빠져들고, 미성숙한 감정과 태도로 관계를 악화시키는 자신을 바로잡기는 힘들다. 알고 있어도 내 삶에 끌어들이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자기의 부족함을 마주할 용기와, 달라지고 싶다는 열망이 담긴 에너지,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견뎌낼 인내와 성실함이 필요하다.
완벽주의가 '더없는 행복'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라면, '어설픈 완벽주의자'인 나는 결코 '더없는 행복'에 이를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더 쉬운 방법으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지금의 삶에 만족할 만한 것들을 찾는다.
살아있다는 것, 좋은 엄마가 되려 애쓰고 있다는 것, 먹고 자고 일하고 쉬는 것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한다는 것, 조금 더 온화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는 것, 세상이 두렵지만 내가 선 자리에서 한 발씩 삶의 반경을 넓혀나가려 노력하는 것, 나이는 들어가지만 여전히 내 삶에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느리지만 꾸준히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 이런 것으로 나를 긍정한다.
내 '앎'을 '삶'에 겹쳐보면 어긋나는 데가 없다. 'ㅇ'안에 'ㅅ'이 온전히 들어가고, 'ㅏ'와 'ㄻ'이 정확히 일치한다. 아직 아는 것이 부족해도 괜찮다. 삶에 들어온 앎은 힘이 있다. 뻔해서 흘려듣기 쉬운 진리가 일상이 된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내 삶도 앎과 함께 커진다. 앎과 삶은 그렇게 닮은 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