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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샘 Dec 11. 2023

<불안의 밤에 고하는 말>

비에 젖은 것은 내가 아니라 옷이다

<매트 헤이그 지음, 최재은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2.>



오랜만에 대학 동기에게 연락이 왔다. 파트타임으로 일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다. 전업주부임을 알기에 '풀타임 잡'을 가진 다른 친구들을 모두 제치고 내가 생각이 났단다. 챙겨야 할 가족들이 모두 집에 있는 주말이었으므로, 전업주부답게 부재중 전화를 보고 뒤늦게 건 전화에서 들은 이야기다.


40대에 이르면 삶의 흔적이 쌓여 실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직업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았다거나 자산을 늘렸다는 이야기는 이 나이 무렵부터 시작된다. 일할 의향을 물어온 친구를 비롯해 대학 동기들은 거의 일을 놓지 않았다. 일과 가정을 모두 챙기며 고단했을 삶에 대한 보상처럼 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잠깐 노파심에 잔소리를 보태자면 전업주부라는 말에 내 감정을 예단하지 말기 바란다. 사회적인 커리어가 단절된 전업주부라고 해서 서글프지는 않다. 나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는 대신 최우선 순위에 따라 양육과 돌봄이라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고 있으니까. 언젠가 이 역할이 줄어들 때가 있음을 알고 있으니, 그때 가서 또 다른 우선순위에 따라 내 에너지를 집중하면 된다. 그러니 '전업주부'라는 말로 뭉뚱그려지는 오해를 받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도 초야에 묻혀 사는 돌봄 노동자에게 발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 사는 지인의 '목적 있는 안부 전화'는 자극이 된다. 내 삶을 비교의 잣대로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살고 싶어 SNS도 하지 않는데, 비교하는 마음은 수시로 찾아와 나의 가치를 시험에 들게 한다.



전화 한 통에 생각이 많아지니 <위로의 책>에 이은 매트 헤이그의 에세이집, <불안의 밤에 고하는 말>이 생각난다. 불안과 공황장애로 자살 직전까지 갔던 작가가 이를 극복하고, 감정적 기복은 있을지언정 무던한 일상을 살아가며 생각하는 것들이 두 권의 에세이에서 잘 드러난다. <위로의 책>이 개인적인 측면에서 마음을 다독거려 주는 책이었다면, <불안의 밤에 고하는 말>은 SNS나 현대 기술 문명으로 이어진 사회적 관계의 측면에서 불안을 잠재우는 조언을 한다.


나이가 들수록 걱정이 많아진다. 어릴 때는 불투명한 미래라는 내 한 몸만 걱정되고 불안할 뿐이었는데, 이제 내 나이 듦과 같은 속도로 늙어가는 부모를 보살피는 일부터 오로지 나로 인해 세상에 내던져진 아이들을 키우는 모든 순간이 걱정이나 염려와 함께 한다. 부모를 모두 잃고 나도 걱정은 줄지 않는다. 그들과 비슷한 과정을 겪으며 늙고 병들어갈 나와 남편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더해진다. '걱정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걱정과 불안은 늘 비슷한 무게로 삶을 채운다.


그뿐이 아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사회적 관계는 그것이 가상이든 현실이든 간에 온갖 정보와 자극이 넘쳐나는 거대한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상이다. <위로의 책>을 읽고 존재 그 자체로 내가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위로를 받아도, 세상은 이 사실을 잊어버리도록 끊임없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속 시원하게도 저자는 이를 '미친 세상'이라 말한다. 미친 세상 속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니 불안한 것은 당연하다고, 그것이 우리의 내면이 단단하지 못해서가 아니라고, 세상이라는 거대한 쓰나미로 인해 내가 흔들리는 것일 뿐 내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한다.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로 나의 정체성을 규정해서는 안 된다. 불안할 때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뒤흔드는 세상을 직시하고, 그 거센 파도로부터 한발 물러서서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지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나를 '의식'하는 것이 불안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비결이다.


이유가 있는 불안은 그 원인을 해결하면 큰 문제가 안 된다. 가령 중요한 일이나 시험을 앞둔 불안은 그 결과를 내가 정할 수는 없으므로 시간이 흘러 그 일이 끝날 때까지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하면서 견디면 된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시간이 흘러 그 상황을 겪고 나면 해결될 불안감이다. 그런데 살다 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걱정이나 불안도 많이 생긴다. 작가의 말처럼 그 실체 없는 불안의 이유가 지나치게 자극적인 이 세상이라면 의도적인 '단절'이 필요하다. 스마트폰 하나만 나와 잠시 분리시켜도 그 효과는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발전된 문명의 혜택은 달콤하지만, 기술과 자본의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세상의 전략에 휘둘리기 쉽다. 줏대 있는 삶이 필요한 이유다. 인간이 이루어낸 업적이 인간을 종속시키는 전도된 세상이 가끔 두렵기도 하다. 뒤집힌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작가의 말대로 자연으로 눈을 돌리고 고유한 존재로서의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면 너무 고루한 생각일까? 아날로그가 편한 중년이라 그런지 고개는 끄덕여진다. 실천 여부가 문제로 남을 뿐이다.


존재의 고유함, 현실세계에 대한 자각, 주체적 삶.

이야기가 이쯤 흐르면 실존주의 철학에도 맥이 닿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 세상에 내던져졌으니 흔들리는 마음은 인간의 숙명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와 책임이 있다. 어떤 감정을 선택할 것인지는 나의 자유의지다. 


흔들리는 마음을 내 것이 아니라 낯설게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내 것 아닌 것이 잠시 내 마음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문학 용어인 '낯설게 하기'는 내가 자주 쓰는 삶의 객관화 방법이다. 메타인지가 별 게 아니다.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보는 내 시선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 문학 기법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 행위가 된다. 남의 불안과 걱정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 별거 아닌 걸로 유난스럽게 호들갑을 떠는 것 같다. 곧 지나갈 걱정과 불안임을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알아채는 것이다. 나를 낯설게 보는 것은 딱 그만큼의 거리 두기로 나를 지키는 비결이다.


비가 내리면 옷은 젖겠지만, 그게 다다. 젖은 옷은 마를 것이고, 옷 속의 나는 비를 맞기 전이나 맞은 후에도 여전히 나다. 젖은 옷이 나라고 잘못 생각하지만 않으면 된다. 불안을 잠재우는 비법은,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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