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긴 하지만, 우울증까지는 아니에요."
<삶의 면역을 기르는 자기 돌봄의 심리학, 멕 애럴 지음, 박슬라 옮김, 김현수 감수, 갤리온, 2023.>
고맙게도 트라우마라 불릴 정도의 큰 일은 겪지 않고 평온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스몰 트라우마>라는 제목을 보고 잠시 망설였다. 감정이입이 잘 되는 성향이라 나와 관계없어 보이는 '트라우마'라는 단어에서부터 마음이 답답해진다. 결국 읽게 된 것은 트라우마가 아니라 '스몰'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트라우마가 되려면 결코 작거나 사소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묘한 역설에 마음이 움직였다. 흔한 단어 하나가 이렇게 큰 힘을 가진다. 읽기의 매력을 놓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을 놓쳤으면 어쩔 뻔했나!
서문에서부터 이 책은 나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다. 큰일도 아니다. 이유가 뭔지 딱히 짚지도 못하겠다. 그런데 왠지... 이상하게도... 기분이... '바닥이다'. 뭘 해도 감흥이 없고, 늘 과소평가받는 느낌이고, 별로 사랑받지도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가족과 그럭저럭 괜찮은 직업, 좋은 친구들이 있다. 먹고살기에도 충분하고 머리 위에는 튼튼한 지붕이 있고, 주변 사람들도 착하고 따뜻하다. 매슬로의 5단계 욕구단계설에 비춰 봐도 잘 살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도 왠지... 행복하지가 않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모두가 추구하는 목표가 바로 그 '행복' 아닌가?(p.8 서문 중)
내가 딱 그런 상태였다.
넘치는 여유는 없지만 딱히 부족하지는 않다. 우울하다고 말하면서도 그 이유는 답할 수가 없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는 하나도 없지만 행복이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에 '행복'처럼 두루뭉술하고 사람을 헛헛하게 만드는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아니 나만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 나처럼 어느 정도는 마음을 숨기고 살고 있지 않을까? 매일 얼굴 맞대고 사는, 이보다 더 편할 수 없는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말 못 하는 속내가 누구나 있지 않나?
오랜 연구와 임상경험을 한 저자는 그 이유를 '스몰 트라우마'에서 찾는다. '우리의 삶을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작고 일상적인 일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활력과 열정, 잠재력을 고갈시키는 것 역시 작고 일상적인 일이다'라며 스몰 트라우마의 영향력을 간과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심리치료를 받지 않아도 다시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실용적인 팁도 알려준다. 자기 자신을 돌보는 마음 챙김과 관련된 다른 책들에서도 비슷한 방법을 수없이 찾을 수는 있지만, 저자의 솔루션대로 따라 하면 돈 안 들이고 심리치료를 받는 효과를 느낄 수 있으니 고마운 책이다.
부정적이거나 왜곡되고 억압된 사고를 인식(Awareness)하고, 이를 수용(Acceptance)하고, 원하는 삶을 만들어나가는 행동(Action)을 하라는 단순한 과정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걸리고, 마주할 용기도 필요하며, 없는 일인 듯 살았던 과거의 기억들을 헤집어야 하는 불편함도 뒤따른다. 그래도 지금보다 나을 수 있다면 작정하고 시도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마음 챙김을 위해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제자리를 맴도는 것은 제대로 덤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찮아서, 내 마음은 내가 잘 아는 것 같아서, 혼자 분석하고 처방 내린 지난날의 서툰 시도들을 다시 하려니 생각만으로도 지쳐서 눈으로만 설렁 읽고 말기 때문이다. 심리치료사를 찾아갈 용기가 없고, 그럴 만큼 우울이 심각하지 않다고 여긴다면 셀프 독서치료도 가능하다.
다만 여기에는 읽기만 하지 말고, 뻔한 것 같아도 직접 써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글쓰기를 대단한 무언가로 생각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이 과정에서 손을 놓는다. 떠오르는 대로, 두서없이, 글씨가 엉망이라도 상관없다. 생각을 쓰는 것 자체가 해소의 의미를 지닌다. 마음의 해우소랄까? 지겹도록 들어온 책 읽기와 글쓰기의 효용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언제 어떤 마음의 문제라도 이런 방법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을 지키는 마음 근육을 키울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나에게 그 힘을 일깨우는 것은 언제나 읽기와 쓰기였다. 번듯한 글이 아니라 속풀이 하는 일기였다가, 가끔은 공감받고 싶어 이렇게 공개 설정도 해본다. 내놓기 부끄러운 데가 있다면 혼자만 보면 된다. 중요한 건 쓰면서 나를 돌보는 일이니 잘 쓰고 말고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숱하게 들어본 방법이라 뻔하다 싶어도 다시 해봄직하다.
효과를 얻고 싶다면, 자신을 속이지 말고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작정으로 조그마한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을 쓰던 사춘기 때처럼, 아무도 못 보는 곳에 저자가 질문하는 것을 적어본다. 아무에게도 안 보여줄 테지만, 그럼에도 손이 멈칫거릴 때가 있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심리치료사를 찾아가든 혼자 끄적이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마주하기 힘든 마음이 있다면 그게 나의 스몰 트라우마인지도 모른다. 외면하고 있을지도 모를 스몰 트라우마를 찾아내는 것이 이 책이 주는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