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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샘 Sep 05. 2024

프롤로그

뻔히 아는 이야기지만, 다시 묻는다

잘, 살고 있나?


   프랑스의 중산층 기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프랑스 19대 대통령인 조르주 퐁피두 전 대통령이 언급했다는 중산층의 기준은 꽤나 우아하다. 그 내용은 ‘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한다,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어야 한다.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어야 한다, 남들과 다른 맛을 내는 요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공분(公憤)에 의연히 참여한다,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한다’이다. 그가 재임한 때가 1970년대 초라는 걸 몰랐어도 좋았겠다.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난 옛날 사람인 내가 지금 봐도 어느 하나 옛날 느낌이 나지 않는 상당히 멋진 삶을 표현했다. 게다가 그것이 넘치거나 부족한 계층이 아니라 가장 보편의 삶을 산다고 여기는 중산층의 기준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놀랍다. 

  남편과 이걸 같이 보면서 중산층이라 믿었던 우리 삶은 '서민'이었음을 씁쓸하게 깨달았다. 외국어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에서 겨우 필요한 단어들을 제멋대로 뱉어내는 생존 영어 수준이고, 운동은 담 쌓고 살아왔다. 어릴 때 배운 피아노는 잊은 지 오래고, 날마다 밥상을 차려내면서도 할 때마다 맛이 달라지거나 레시피를 봐야 하는 요리가 대부분이다. 그뿐인가, 수퍼 샤이임를 핑계로 촛불집회 한 번 나가보지 못했고, 봉사는 나이들어 여유있을 때나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나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다행인 건가.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생계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어서 남들만큼 사는 중산층일거라 생각했던 나의 단순한 생각이 프랑스 기준을 보면서 단번에 무너졌다.


  잘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나의 관점과 기준에서 어떤 삶이 '잘' 사는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잣대가 없으면 보편의 기준을 따르게 된다. 이때 누구에게나 그렇다고 인정받는 적정선이라는 것은 대개 내 수준보다 높다. 반 세기 전 프랑스까지 멀리 갈 것도 없다. 보편의 기준은 늘 소외감을 준다. 나와 비슷한 형편이라 생각했던 누군가의 SNS에는 나보다 훨씬 더 멋진 일상이 올라온다. 매일이 그런 모습은 아닐거라고 옹졸해진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세상의 기준이 내 기준보다 높다고 느낄 때 상대적 박탈감이 생긴다. 잘 살기 위한 기준을 스스로 되뇌이면서 그런 것들로 마음이 황폐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뭐냐고 물으면 답은 사실 뻔하다. 마음 같아서는 '충분한 돈, 남부러울 것 없는 직장, 언제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 같은 거라고 답하고 싶지만, 이 역시 남들의 부러운 삶을 따라하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웰빙에 돈이 필수적인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안다. 정서적 지지를 해주는 화목한 가정, 건강한 몸, 편안한 마음, 충분한 수면, 생활에 활력을 주는 일, 혹은 그 어느 것도 충분치 않아도 스스로의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긍정하는 삶의 태도 같은 것이 오히려 잘 사는 데 필요한 요소다. 너무 뻔해서 당연한 것들이라 별 감흥이 없다. 이 중 어느 한 가지만 문제가 생겨도 일상이 무너진다. 잘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걸 뻔히 알지만, 그 뻔한 걸 잘 챙기고 있는지 물으면 자신있게 대답하기 어렵다. 


  다시 돌아가자.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알고, 그것을 잘 챙기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나’라는 주체에서 시작하기로 한다. 세상의 잣대가 아니라 나의 주관으로 묻고 답하는 것이 내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다.     

  나는 잘, 혹은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많은 생각과 고민이 필요하다.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나만의 기준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답은 둘째치고, 내 삶의 기준을 마련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잘 사는지 확인하고 싶을 뿐인데 그 과정이 만만치가 않다. 잘 사는 일은 쉽지 않다.     



나에게 묻는다 

    

  제대로 된 질문 하나 하는데도 빠질 수 없는 것이 ‘나’이다. '나'로 살고 있어서 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우리는 늘 이만하면 된 거라고, 지금도 나쁘지 않은데 뭐하러 힘들게 사냐고, 더는 힘들어서 못 한다고, 안 될 것 같으면 다른 길로 가는 것도 방법이라고 속이거나 꼬드기는 '마음 속의 나'와 함께 산다. 만화 주인공의 머리 양 옆에서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두는 천사와 악마의 속삭임은 내 마음의 갈등이다.  내 속을 나도 잘 모를 때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옛 노랫말이 떠오른다. 나를 제대로 아는 것이 어쩌면 진짜 잘 사는 법일지도 모른다. 

  마흔이 넘고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보니, 청소년일 때보다 더 자아 정체감 찾기에 공을 들이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마흔의 삶이 주는 바쁨과 오십 너머의 삶이 주는 막연함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흔들리는 마음속에는 나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남편과 시댁 식구, 죽고 없는 내 부모까지 들어 있다. 굳건히 서 있기에는 벅찬 무게다. 그 힘든 마음을 공감해주는 어른의 이야기를 읽는다. 정신분석 전문가 한성희의 <벌써 마흔이 된 딸에게>(메이븐, 2024)가 그 책이다.     



  “딸아, 네가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것은 바로 너 자신이다. 남들이 뭐라든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가기를…”

  “모든 걸 잘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설령 네가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해도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책을 읽기도 전에, 표지의 이런 문장들이 마음에 파고들었다. 너무나 애쓰고 살고 있는데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가족들 챙기느라 늘 뒷전에 밀리는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고 두려울 때 읽으면 좋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말을 들려주는 70이 코앞인 저자는 고려대 의대 여성 1호 출신에 나이 60에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슈퍼 엘리트 할머니고, 저자가 진심을 다해 위로하고 격려하는 그 딸은 미국 유학을 가서 결혼하고 기업 중간 관리자로 일하면서 아이까지 키우는 워킹맘이다. 경력은 부럽기 그지없는 모녀지만, 여자로 살아가는 삶은 비슷한 고민과 어려움이 있다. 그 지점에서 마흔이 훌쩍 넘은 나도 책 속으로 빨려든다.

  저자는 40대에 인생 후반부를 고민하고 성장통을 겪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애 발달 과정이라고 한다. 많은 마흔이들이 오래 산 것 같아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별로 없고, 뭘 해보자니 이 나이에 시작하는 게 새삼스러워 고민하다가 그냥 포기하고 만다. 마흔에 스스로 너무 나이 들었다고 단정하고,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로 책임과 의무만 가득한 삶을 살았던 것을 후회한다는 저자의 이야기는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지금처럼 살다가 나도 그런 후회를 하게 될 것만 같다. 

  삶을 먼저 살아간 이들의 조언은 유용하다. 심드렁한 일상이 답답하고 이게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드는 나날들이 이어진다면, 그 마음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내면의 목소리가 한숨과 답답함 혹은 우울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치유법을 찾아 헤매기 전에 마흔의 삶을 사는 나를 이해하는 일이 먼저다. 뻔한 이야기지만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인정하고 나를 위로하는 것이 잘사는 법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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