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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en rabbit Mar 15. 2024

생각은 OpenAI로 일은 Figure가 그럼 나는?

우리 집에도 이모를 들였다. (로봇 청소기를 사용자들이 이모라고 부른다) 주문을 하고 로봇 청소기를 쓰는 후배에게 사용해 보니 어때? 하고 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대뜸 말했다.

"쓰지 마. 쓰지 마."

"왜?"

"그거 청소 못해. 소용없어."


집에서 곰곰이 집안을 살피며 고민했다. 그래, 저 식탁 의자 사이로 로봇이 어떻게 들어가지? 바닥에 떨어진 양말을 흡입하면 어쩌지? 열어 놓은 문 뒤쪽은 어쩌지? 결국 다시 사람 손이 가야 하는 건가? 괜히 샀나 후회가 됐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처음 입양해서 청소를 시키니 가관이었다. 발 걸레를 들이마시고 멈추고, 마루에 놓인 빨래대에 갇히고, 쓰레기통을 쓰러뜨리고는 어쩔 줄 모르고 징징 울었다.

"왜 진작 이모 안 들이고 그 고생을 했나 후회돼요."

이러던 후기들은 과연 모두 낚시였던 것인가?!


하지만 보름이 지난 지금 내 의견은 이렇다.

"이모가 맨날 쓸고 닦아 주니 이렇게 편한 걸,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을까!"


처음 마주하는 낯선 것들에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다. 그것을 불쾌한 골짜기 Uncanny Valley라고 한다. 로봇이 점점 인간과 닮아질수록 호감도가 높아지다 일정 수준에 오르면 오히려 불쾌감을 느낀다는 이론이다. 나는 그걸 <소피아> 같은 사람 얼굴을 한 로봇의 불쾌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난 13일 인공지능이 탑재된 Figure 01이 선을 보였다. 여기에 피부를 입히고 표정이 사람을 닮아가면, 그때 비로소 그 불쾌한 골짜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소피아>는 그냥 인간과 전혀 닮지 않아 불쾌했을 뿐이었다.

이번에 발표된 figure 01은 open AI를 탑재해 인간과 대화를 할 수 있다. 테슬라의 옵티머스를 보고 여기에 LLM을 연결하기만 하면 놀라운 로봇이 될 거라고 말했던 그대로다. 십 수년 전 영화 <아이언맨>에서 주인공 토니가 동굴에서 만든 첫 로봇에 프로그램을 로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땐 그런 장면이 왜 필요한지 전혀 몰랐다. 쇳덩이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저 구동축과 모터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왜 필요한지 이제는 안다.

세상은 바야흐로 또 한 번 어마어마한 변화를 맞이하기 직전이다.


그리고 나 또한 어떤 변화에 직면한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세상은 계속 변하는 데 나는 더 이상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 게다가 이모에 관해서든, 잘난 체하는 불쾌한 골짜기든, 아이언맨이 나오는 영화든 도대체 제대로 아는 것도 없다. 때문에 나도 지난 20여 년을 해 온 일을 이제 그만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에 빠져 있는 중이다. 

나는 언제나 이야기에는 세 가지 미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진정성이다. 작가 스스로가 자신의 글에 진정성을 느껴야 함은 물론이고, 읽는 사람들이 진정성을 느낄 있도록 핍진성도 갖추어야 한다. 진정성은 간혹 이야기 형식이문장의 아름다움으로 구현되기도 한다. 두 번째는 발견이다. 어떤 이야기든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그저 매번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새롭게 느껴질 있게 하려면 작가만의 시선이 담긴 "발견"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건 가끔 영감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동 시대성이다. 나이나 소득 수준, 혹은 사회적 계급에 의해 모두 다를 뻔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 사이에 동 시대성이란 공통점은 뜬구름 같은 이야기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동 시대성을 가질 있을까? 우리는 수치로 치환되는 사람들의 평균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 수없지만, 같은 시대를 살면서 느끼는 사회적 모순, 인간관계의 가려운 점, 혹은 희망과 가치, 염원 따위를 여렴풋이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동 시대성이 만들어진다. 때문에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가지를 놓쳐 버리고 같다.


예전에는 비록 내가 생각한 대로 살지는 못해도 적어도 생각은 하고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생각한 데로 살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을 하지 않고 산다는 것과 다른 말이 아니었다.

세상이 변하고 시대가 변하고, 그리고 이제 내가 퇴장할 때가 온 것 같다.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지만, 이건 그저 생각하지 않고 지금껏 살아온 삶의 성적표일 뿐이다. 긴 말이 쓸데없다.


이제 생각은 open Ai에게 일은 figure에게 시키고... 앞으로 나는 뭘 해야 하나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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