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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르야, 당근이는 축복받으러 왔단다

반려동물 축복식

by 모니카
차르 뒤태


남쪽 지방으로 이사 간 탄이네 가족이 우리 성당에 모처럼 왔다.

탄이 네는 엄마 아빠 탄(연탄처럼 새까만 푸들), 이렇게 세 식구였는데 고양이 당근이가 합류하여 네 식구가 되었다.


미사 시간 내내 탄이는 아빠품에, 당근이는 엄마 옆 이동장 안에서 낑낑, 냥~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당근이가 원래 바깥바람을 쐰 고양이이긴 하지만, 집고양이 된 지 1년이 넘었는데 외출냥이가 되다니!

부럽고 신기했다.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우리 성당에는 길고양이도 즐겨 찾는다. 신부님이 항상 성당 마당 한쪽에 사료와 물을 구비해 놓아서 그런지 고양이들이 많이 찾아온다.


당근이도 우리 성당에 찾아온 냥이다.


어느 날 성당 밴드에 신부님이 고양이 한 마리를 올리셨다.

심하게 다친 데다 누런 털까지 뒤덮여 형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먹을 것을 찾아왔는지 며칠을 힘들게 왔다 갔다 했는데 똥도 제대로 처리 못하는 것 같았다.

원래 길고양이는 아니었는지 사람 손을 거부하지 않아 신부님이 잡아서 병원에 데려갔다.

동물병원에서도 부상이 너무 심해 처음에는 살릴 수 있을지 장담을 못했다고 하는데 다행스럽게 생명을 구했다.

신부님이 털색깔대로 당근이라고 이름도 지어 주어 환자명이 당근이가 되었다.

다친 곳이 많아 위태위태하면서도 조금씩 회복되어 가는 모습을 밴드를 통해 볼 수 있었다.


드디어 퇴원을 하고 신부님은 입양 희망자를 구하셨다.

그때 탄이네가 당근이를 입양했다. 탄이는 7살이고 당근이는 3~4살 정도여서 당근이는 탄이 동생이 되었다.

당근이는 나날이 멋진 페르시안 고양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털이 풍성해 덩치가 큰 줄 알았는데 5kg인 차르 보다 몸무게가 나갔다.

나에게 첫 고양이인 차르가 겁쟁이에 까칠하고 체육냥이라 그 연령 때는 다 그런 줄 알았는데 당근이는 순하고 조용하고 차르만큼 움직임도 덜한 것 같았다.


멀리 이사 갔어도 잘 지내고 있는 당근이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탄이랑 사이가 아주 좋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았다.

탄이는 그동안 외동으로 사랑을 독차지했을 터여서 혹 스트레스가 심할까 걱정스럽기도 했는데, 오히려 탄이가 장난을 걸고 당근이가 피한다고 한다.

'역시 고양이는 고양이니까, 까칠하고 도도한 게 너의 매력이긴 하지~'


품종묘인데 무슨 사연으로 길 위에 버려졌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생사의 문턱을 넘고 좋은 가정에 입양되어 잘 사니 복 받은 고양이다.



우리 성당은 매주 함께한 동물도 축복을 받는다.

오늘도 영성체 시간 마지막에 신부님이 동물들은 축복해 주셨다.

성도들 수에 비해 우리 성당은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이 많은 편인데 고양이는 데려올 수가 없어 항상 아쉽다.


그동안 탄이와 늠름한 진돗개 유이만 축복을 받아 왔다.

탄이와 유이는 이제 익숙해서 머리에 축복해 주는 신부님 손을 얌전히 기다렸다가 간식을 받아먹을 줄 안다.


그런데 고양이 당근이가 이동장에서 나와서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얌전히 있을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당근이도 엄마 어깨에 걸쳐 안긴 채 축복을 받았다. 발버둥 치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다.



미사 후에 당근이 엄마가 이동장을 열고 당근이를 인사시켜 주었다.

'너 고양이 맞니?'




우리 차르만 해도 동물병원 가려면 이동장에 넣을 때부터 씨름을 해야 하고, 집 밖만 나와도 바짝 쫄아서 몸이 굳고 야옹 거리는데 데려와서 긴 시간 미사드리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차르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다른 집사들도 이구동성이다.



신부님은 매주일 영성체 때마다 같이 한 동물들 축복을 해 주지만, 주기적으로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모든 반려동물 축복식을 거행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데려 올 수 없는 동물은 사진으로, 혹은 유골함으로도 축복을 받는다.


동물 축복식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명체의 소중함을 함께하고 그들과 공존하는 것을 다짐하는 경건한 의식이다.

외국에서는 이미 보편화된 문화이고, 우리나라도 지금은 우리 대한 성공회뿐만 아니라 천주교, 개신교, 불교계에서도 많이 시행하고 있다.

'반려'가 '짝이 되는 동무'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영어로도 '컴페니언 애니멀(companion animal)이라고 하니 사람과 동물이 벗하며 지내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인 것 같다.


성서 창세기 1장 22절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했고, 큰 홍수를 피하고자 만든 노아의 방주에 하느님은 각 동물을 암수 한 쌍씩 태우라고 하셨듯이 하느님은 인간과 동물이 공존하라고 명하신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신부님께도 심심찮게 '동물에게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웃보다 동물 돌보기에 더 집중하느냐?' 하며 동물축복식에 대한 항의 전화가 오는 것을 봐도 아직은 반대의 목소리도 크다.


반대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겠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생명은 귀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아닐까!


사람과 반려동물과의 교감, 그들이 주는 위로와 위안과 행복이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고 당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통과 슬픔을 느끼는 생명체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엄마 냥이랑 헤어지고 세상 모든 것에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을 우리 차르가, 우리 가족에게 얼굴과 몸을 비벼대고, 배를 드러내고 눕고, 옆에서 먹고 잘 수 있는 것은 우리 가족이 그렇듯, 차르도 우리 가족에게 신뢰와 믿음과 사랑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차르도 우리 가족의 일원이므로 나는 대림절 새벽기도 때 차르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차르야~

당근이는 엄마 품에 안겨 축복 기도를 받았단다.

너에겐 무리인 줄 알지만 엄마는 살짝 부러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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