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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차르의 루틴을 깼을까?

by 모니카
억지로 졸음을 참는 차르


보름 전까지만 해도 평일 낮에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들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리는 폭우도 첫눈도 선팅 된 창문 틈새로 내다봐야 했고, 평일 낮에 돌아다니는 것이 이상하게 낯설고 어색했었다.


지금은 아무 때나, 어느 곳이나 내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오래 하던 일을 그만 두면 갑자기 긴장이 풀려 병이 날 거라고 주위 사람들이나 나나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아직 한 달이 채 안 돼서 그런지 주체 못 할 것 같은 24시간은 어영부영하다 보면 후딱 지나서 벌써 잘 시간이 되었다.


"샘, 제 전화 꼭 받으셔야 해요!"

"어디서 다시 학원 차리시면 저 꼭 찾아갈게요."

"저 수능 때까지 책임지신다고 했잖아요~"


학원 문을 닫는다고 하자 공부도 안 하던 녀석들의 아우성치는 소리가 어제 들은 소리처럼 낯설지 않고 아이들과 씨름하는 장면이 내일이면 또 벌어질 것 같은, 이를테면 아직 내 생활의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는 나날이다.


아무튼 일단 좀 쉬자 하고 자유와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우리 차르가 이상해졌다.


아침밥 듬뿍 먹고 간식도 먹고 오후 1시쯤이면 캣폴 투명해먹에 파묻혀 있던가, 자기 굴 속에서 몸을 말고 자야 할 차르가 잠을 안 잔다.


오전 집안일 끝내고,

포근한 공기가 감도는 실내에서 따뜻한 차와 상큼한 귤과 고소한 땅콩을 까먹으며 한 손으론 옆에 발랑 누워 행복하게 졸고 있는 고양이의 보들보들한 배를 만지작 거리며 책 읽기!


그럴 줄 알았는데 그런 건 나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차르가 온종일 야옹거리며 따라다닌다.

설거지할 때도 내 발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고 내가 이리저리 움직이면 어딘가에 있다가, 쉬려고 하는 순간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보거나 책을 펼치거나 눕기라도 하면 이 작은 감시자가 그 꼴을 못 보겠다는 듯 물려고 덤벼든다.

딴짓은 물론 딴생각도 못하게 하는 것 같다.


"그냥 너만 쳐다보라고?"


그럴 때 차르가 좋아하는 이마에 뽀뽀 세례를 퍼부으면 그 매혹적인 연두색 눈을 깜빡이며 좋아하지만, 곧 그만하라는 신호가 손끝에 감지된다. 물릴 각오를 하지 않은 이상 멈추라고 할 때 얼른 멈춰야 한다.

그리고 계속 야옹야옹거리는데 당최 뭐라고 하는지 해석을 못하겠다.


"차르야~ 어떻게 하라고?"


물려고 할 때는 자리를 피하라고 한 말이 기억나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다.


아~ 그때부터 들리는 차르의 구슬픈 울음소리!

방 밖에서 들리는 그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무시하고 내 할 일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무신경하던가 아주 모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아무래도 최근 나의 생활변화가 차르를 혼란스럽게 한 것 같다.


사실 집냥이 차르의 루틴은 우리 식구들 생활 패턴에 맞춰 조정된 것일 거다.

예를 들어 차르는,

식구들이 다 나간 오후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거나 늘어지게 잠을 자고, 오후 4시쯤 되면 할머니가 주는 맛난 간식을 먹고 또 한잠 자고, 저녁 6시가 되면 할머니가 기다리던 습식을 주셔서 배불리 먹고, 쉬아도 하고 똥도 싸고, 밤 9 시쯤 되면 엄마 아빠 형이 차례대로 와 신나게 뛰어놀고, 귀염 받고, 이제는 습식은 안 줄 테니 건식이라도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고, 엄마가 밤마다 시키는 양치를 이리저리 피해 도망 다니다 결국은 잡혀 꼼짝없이 양치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

그것이 몸에 밴 루틴이었을 거다.


그런데 왜 요즘은 엄마가 매일 집에 있는 거지?

주말이야 엄마랑 같이 있고 노는 것이 좋지만, 왜 매일 집에 있냐고요? 잠도 못 자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아들과 광화문에 갔었다.

저녁 5시쯤 나가서 밤 10시쯤 들어왔는데 오자마자 시어머니가 난리다.


"요 며칠 너랑 같이 있더니 얘가 변했다. 너네 나가고 얼마나 큰 소리로 우는지 동네 사람들 쫓아올까 봐 얼마나 맘 졸였는지 아니?

달래도 소용없어~ 간식 주면 먹을 때만 조용하고 또 울고..."


얼마나 시끄럽게 울었는지 잔뜩 짜증 난 불똥이 나한테 튀었다.


"분리불안 아니야? 현관을 보며 한참을 울더라고."

9시쯤 들어왔다는 남편도 거들었다.


차르가 분리불안?

고양이는 독립심이 강하고 주인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서 개와 같은 분리불안은 거의 없는 동물이라고 하던데?


아까 나갈 때,

캣폴 투명해먹에 몸을 묻고 있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봐서 '안녕~ 갔다 올게' 하고 손을 흔들어 주긴 했다.

나가고 들어올 때 표 나게 인사를 하던가 관심을 과하게 보이지 않는 게 좋다고 하지만 차르는 뭐 손을 흔들던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하던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다 나간 뒤에는 온종일 잠도 잘 잔다고 하고...


그런데 오늘은 우리가 나간 후에 그 사달이 난 모양이다.


과도하게 우는 것도 분리불안의 한 증세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저 혼자 남겨 둔 것도 아닌데.

할머니가 달래도 그렇게 오랫동안 울었다고 하니 화가 나실 만도 하겠다.


사실 고양이 이 분리불안 증세는 눈에 잘 띄지 않는데 그래도 체크해 볼 증세는 있다고 한다.


바로 '관심'을 요구하는 경우라고 한다.


차르는

퇴근 후 집에 왔을 때 따라다니면서 울기 시작했나?

집안의 물건을 자주 넘어뜨려 떨어트리고 스크래처가 아니 곳을 심하게 긁었나?

혼자 있는 동안 화장실을 안 가고 참고 있다가 집사가 돌아왔을 때 용변을 봤나?

집사가 없는 동안에 밥을 안 먹거나 아주 조금만 먹다가 집사가 돌아오면 야옹거리고 쳐다보다 집사가 보면 그때서야 밥을 먹었나?

오버 그루밍을 자주 보여서 심한 경우 심인성 탈모가 생겼나?


차르는... 다행히 해당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차르는 분리불안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왜 평소와 다른 행동을 했을까?


아무래도 최근 나의 일상 변화가 차르에게 영향을 준 게 맞는 것 같다.

어머니도 콕 집어서 말씀은 안 하시지만

'매일 없던 네가 하루종일 있느니 애가 헷갈려서 그런 거 같다'라고 혼잣말하신다.


사실 차르는 아들과 나한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주말에는 잠을 덜 잔다.

'하루종일 같이 있으면 얼마나 좋아할까'는 내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나의 변화가 차르의 하루 루틴을 깨버렸고, 생활의 리듬이 깨진 차르는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렇게 과하게 운 건 아닐까?


고등학교 3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했던 나는 개학 전날이 너무 힘들었다.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독립이 안된 상태에서 집을 떠난 것 같았다. 기숙사로 돌아가면 또 금방 그 생활에 적응되곤 했지만 3년 동안 방학과 개학의 변화하는 생활에 꽤나 힘들고 우울했었다.


차르도 그렇지 않았을까?

좁은 영역에서 익숙한 루틴 아래 생활하던 차르는 비록 좋아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자기 혼자만의 시간에 갑자기 내가 등장해서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아니,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시도 때도 없이 쓰다듬고, 간식을 주고, 놀아주는 것을 거부하지 못하다 보니 집착만 심해지고 잠도 제대로 못 잤는지도 모르겠다.



울 때마다 반응을 하면 우는 습관을 고칠 수 없다고 해서 아무리 울어도, 어렵지만 무관심 무반응으로 나가기로 했다.


한참을 울다 어디엔가 들어가 잠을 자는지 조용하다.


성묘의 경우 하루 13~15시간은 수면을 취해야 한다는데 내가 지켜본 바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나의 등장으로 그랬을 수 있다.

말 못 하는 동물에게 너무도 생각 없이 자각 없이 나만 좋아하고 내 위주로만 행동한 것이 미안해졌다.


차르가 관심을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관심을 받으려고 내버려 두지 못한 것 같다.


관심과 사랑도 너무 지나치면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진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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