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가엽게 보인 날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것 중 버려야 할 1순위가 뭔지 아세요?"
"옷이요~"
"그릇이요~"
"저는 신발이에요."
"책 아닌가요~?"
다들 비슷할 테니 별로 궁금하지 않은 얼굴들이다.
"남편이에요~"
교수님의 의외의 답에 모두 웃으며
'맞아요' 하고 맞장구쳤다.
"제가 신혼 때 된장찌개를 맛있게 끓여놓고 남편이 퇴근하기를 기다렸잖아요.
왜 그랬나 몰라 그냥 먼저 먹을 것이지."
강의 내용보다 더 쏙쏙 들어오는 곁다리 얘기에 다들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사람을 기다리게 해 놓고 샤워하러 들어가서는 안 나오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식은 된장국을 또 데폈잖아요."
강의를 하는 교수님이나 듣는 학생들이나 비슷한 연령대라 그런지 다 겪어본 일이라는 듯 분위기가 여유롭다.
"아니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국을 지금 몇 번째 데피는데...
그때는 새댁이라 문도 못 열어보고 기다렸잖아요.
물소리도 계속 났거든요~
그런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안 나오는 거예요."
왠지 안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살짝 긴장이 됐다.
"갑자기 겁이 나서 문을 벌컥 열었잖아요.
근데 글쎄 남편이 욕조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는 거예요. 샤워기 물은 위에서 계속 쏟아지고.. "
"아~"
평소 교수님 남편 얘기를 자주 들어서 무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기저기서 놀란 한숨소리가 나왔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이 난 줄 아세요?
그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가 아니라
나, 이제 어떻게 살지? 였어요~"
웃을 상황이 아닌데 모두 쿡쿡 웃었다.
"심폐소생술을 할래도 새댁이 혼자 그 무거운 남자를 어떻게 욕조에서 꺼내겠어요. 더구나 물에 젖은 몸을..."
지난 이야기라 여유롭게 이야기하시겠지만 그 당시 얼마나 놀랬을까 짐작이 되고 듣는 우리도 무사히 고비를 넘겼으니 이야기하시겠지 하면서도 바짝 긴장이 되었다.
간호사였던 교수님은 물부터 잠그고 남편의 가슴을 온 힘을 다해 쾅쾅 내리쳤다고 했다.
쾅! 쾅! 쾅!...
그제야 남편이 퓨~~ 한숨을 내쉬었다고...
용감한 새댁의 행동에 감탄하며 모두 퓨~~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요양보호사 교육 중 맞닥뜨릴 응급 상황 대처법과 심폐소생술에 대한 수업 중이었다.
"나랑 같이 사는 사람이..."
"그 인간이..."
교수님이 남편을 이렇게 불러서 처음엔 꽤 정 없이 사시나 보다 생각했는데 듣다 보면 서로 친구처럼 재미있게 산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술 좋아하는 그 인간 친구가 근처에 왔다고 불러내는 거예요. 나는 술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안주라도 먹으라고 굳이 같이 가자고 하는 거예요~
지겹게 안주만 집어 먹었어요.
왜 따라갔나 몰라 증말~
그 인간이 화장실 갔을 때 친구가 뭐라는지 아세요?
ㅇㅇ(교수님 남편)이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은 나랑 결혼한 거라나~"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다들 기분 좋게 웃었다.
두 분 다 정년퇴임 후 가끔 강의를 나가며 이제 며느리 임무도 다 내려놓고 명절이면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부럽기도 하지만 아직은 우리 네 식구가 북적북적 사는 것이 싫진 않다.
오랫동안 아이들하고만 부대끼고 살아서 이렇게 온종일 강의를 듣고 어른들과 있는 것이 새롭고 재미있다.
아직 아이들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친구에게 얘기했더니 질리게 일을 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
하긴 20년 동안 붙어있던 우리 학원 간판 자리에 다른 학원 이름이 떡 붙어있는데도 덤덤하고 서운하지가 않은 걸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밖에 나오니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싸락은 싸라기, 싸라기는 부서진 쌀알.
부서진 쌀알 같은 싸락눈이 싸락싸락 내리고 있었다.
옷 위에서, 땅 위에서 쌀알처럼 구르는 싸락눈이 싫지않다.정겹다.
싸락싸락 내리는 싸락눈을 맞으며 집에 왔다.
아이처럼 폴짝폴짝 뛰어서 왔다.
오랜만에 맞는 눈이었다.
싸락눈을 맞고 남편은 볼이 퉁퉁 부어서 돌아왔다.
아 참, 설 지나고 이빨 대공사를 시작한다고 했지!
그동안 심각하게 부실한 치아에도 아홉 번 구운 죽염 하나면 된다고 버티더니 어느 날 말없이 치과에 다니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충치와 잇몸을 치료하고 이제 설 지나면 7개나 되는 임플란트를 심기 시작할 거라고 했다.
앓아누운 것이 기억 안 나서, 엄살 부리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저렇게 볼이 퉁퉁 부어도 무심하게 대했나 싶다.
"많이 아파?"
"조금."
싸락눈도 함박눈처럼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눈 이름은 다양하고 예쁘기도 하다.
싸락눈 함박눈 가루눈 진눈깨비.
'눈 결정체'는 바늘모양, 기둥모양, 별모양, 장구모양 등 3,000종이 넘는다고 한다.
'눈꽃 아저씨' 윌슨 벤틀리는 세상에 똑같은 눈송이는 없다고 했다. 지문만큼이나 다양하다고 했다.
ㅇㅇ아빠!(여보라는 말을 못 한다)
세상에 똑같은 모습으로 사는 부부는 없을 거야!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심폐소생술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