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를 놔주어야 할 목록에 추가하다.

by 모니카


살다 보면 잊어야 할, 놔주어야 할, 지워버려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잊고 싶지 않다고 해서, 빨리 잊고 싶다고 해서 순서대로 멀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랑하고 소중한 것들은 너무 빠르게 잊혀서 슬프고, 기억하기 고통스러운 것들은 오래도 남아있어 괴롭다.


또 하나를 놓게 되었다.

소중하고 귀하기도 하지만 아프고 슬프기도 한 것이어서 그 자리에 한참 머물기는 할 것 같다.



익숙한 건 참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다.

어둠 속을 달리는 지하철의 규칙적인 소음이 이렇게 안락하고 포근하게 느껴지다니.

가운데 통로에 등을 맞대고 있는 낯선 좌석에 파묻히니 저절로 눈이 감겼다. 서로 두툼한 패딩을 입은 탓에 옆사람과 조금의 여유도 없지만 오히려 포근한 이불속에 싸인 것처럼 따뜻하고 편안했다. 어떨 땐 이런 혼잡한 것에 숨이 막힐 것 같아 견디기 힘들었는데... 그러고 보면 신체의 많은 증상은 마음이 준다는 게 맞는 것 같다.



기차 멀미를 다하냐고 놀림을 받으며 탔던 중앙선 열차길을 이제는 경의중앙선이라는 이름으로 달리고 있다. 복잡한 기차에서 달걀과 사이다, 브라보콘을 사 먹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지금은 양쪽으로 길게 앉은 사람들이 모두 말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서울의 지하철 풍경과 다를 바 없다.


차창 밖으로 추수 끝난 넓은 들판과 낮은 산들과 남한강 줄기가 이어졌다.

그래도 강과 산은 그대로 있어주어서 다행이다.


눈이 시원해지고 가슴이 트이는 상쾌함 대신에 오늘은 마음이 무겁다.

제 또다시 이 길을 달릴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오 남매 중 주말 근무인 장남만 빼고 모두 모였다.

몇 년간 세 들어 살았던 사람들이 이사를 간 후 6개월 이상 빈 집이어서 많이 상했을까 걱정했는데 이 엄동설한에 춥기로 유명한 양평지역에서 물도 얼지 않고 온전했다.

엄마가 열어주는 집이 아닌, 굳게 잠겨 있는 집 번호키를 누르고 들어갔다.

장롱과 화장대, 냉장고와 소파... 가구들이 놓여 있던 자리를 말없이 서성여 보았다.

아직 그대로 있는 엄마가 좋아하셨던 빨간색의 변기와 세면대, 가스레인지는 엄마의 손길이 금방 지나간 듯했다.


집 밖을 둘러보았다.

나중에 이층을 올려 같이 살자고 하면서 평평하게 설계한 옥상에 올라가니 고양이 한 마리가 빠르게 도망갔다.


풀이 무성했던 뒤뜰!

엄마는 뽑아도 뽑아도 자라는 풀 때문에 병이 나실 지경이었다. 전화만 하면 풀 이야기부터 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혼자 감당하기 제일 버거웠던 것 중에 하나가 풀 뽑기였던 것 같다.

풀이 자라는 것을 막기 위해 자갈을 깔았지만 삐쭉삐쭉 고개를 쳐드는 풀의 기세는 조금도 죽지 않고 오히려 자갈을 헤쳐가며 풀 뽑는 일만 더 힘들게 했다.

풀모기에 물려 아들 딸 손주들 팔다리가 울긋불긋해도 시원해진 뒤뜰을 보셔야만 만족해하셨다.


뽑아도 뽑아도 되살아나는 풀의 그 강한 생명력을 엄마는 나쁜 징조가 계속 살아나는 것으로 생각하셨을까?

전화를 할 때마다 제일 먼저 풀 얘기를 꺼내시던 엄마의 마음을 좀 더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대화하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그 뒤뜰도 추위에 생명을 잃고 있었다.



부동산 경기가 죽어서 언제 팔릴지 모른다고 했는데 사람의 일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말을 또 한 번 실감하게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매매성사가 안 되더니 어제 한 노부부가 엄마의 집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망설임 없이 계약을 하자고 했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으로 엄마 집을, 엄마 흔적을, 엄마와의 추억을 돌아보기 위해 모였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남들은 일부러 그쪽으로 귀촌하려고 하는데 그 좋은 곳에 있는 집을 왜 파냐고 아우성이다.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우리 오 남매에게도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집이다.


그러나 엄마가 행복하게 사시다 편안하게 돌아가신 집이 아니어서일까?

우리 오 남매 중 하나라도 노인 복지나 요양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더라면 쓸쓸하게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자책 때문일까?

오 남매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다시 되돌아보기 싫다는...


매매계약서를 작성하고 계약금을 받고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도

어린 시절 추억이라던가, 엄마와 같이 다녔던 곳곳의 기억이라던가, 이 지역에 대한 미련이라던가 그런 언급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잔금을 받을 때는 한 사람만 오자고 의견을 모으고 주인 없는 집 우체통에 쌓여있는 고지서를 챙겨서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여러 가지 감정이 녹아있는 용문이라는 그 지역을 이제 내 마음에서 놔주어야 할 목록에 추가시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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