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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게 상자란?

by 모니카
횡재한 차르




만날 약속이 있었는데 상대방이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밖에서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

사무적인 일로 미리 만나 같이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입구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하긴 30분 일찍 도착한 내 탓도 있어서 마음 편히 기다리기로 했다.


다행히 두꺼운 패딩을 벗어도 좋을 거라는 일기예보대로 햇살이 따사롭기 그지없었다.

만날 장소가 개천을 끼고 있는 아파트 단지 옆이라 한적하고 조용했고 바로 앞에 있는 아담한 교회는 그 따사로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교회 앞에서 얼굴과 손발이 따뜻해지도록 오랜만에 햇볕을 쬐었다.

실로 얼마 만에 맘껏 쬐는 햇살인지 그 따사로움에 지금 30분 넘게 누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잊고 기분이 상쾌해졌다.


교회 옆에는 큰 컨테이너가 있었는데 가까이 가 보니 대형 냉장고였다.

'너무 많이 장을 봤거나, 나누기 위해 산 채소나 과일 같은 음식물을 넣어두면 필요한 누구든지 한 두 개씩 꺼내갈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주변은 고층 아파트만 있는데 과연 누가 꺼내갈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누구에겐가 도움이 된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다.


불과 한 두 달 전까지만 해도 평일 낮에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을 그렇게 부러워했기에 오후 1시의 햇살을 받는 이 순간이 갑자기 행복해졌다.


이번에는 옆 공원으로 가서 햇살을 받아 냉기를 벗은 운동기구를 돌리며 시간을 보냈다.


앙증맞은 옷을 입고 산책 나온 강아지들을 보는 것도 기다리는 지겨움을 덜어주었다.

주인과 보조 맞춰 산책하다 다른 강아지를 만나면 서로 킁킁 탐색하며 짖기도 하고 꼬리를 치며 반기기도 했다.

연신 주인을 올려다보고 다정한 교감을 주고받는 강아지들을 보며 하네스를 차고 공원을 사뿐사뿐 산책하는 고양이를 상상해 본다.

고양이 하네스를 판매하는 걸 보면 산책냥이도 있다는 걸까?

하긴 유튜브에서 산책하는 고양이를 본 적이 있긴 하다.

하네스도 하지 않고 집사랑 같이 산책 코스를 돈 후 자기 집을 정확히 찾아가는 고양이들이었다.

집사도 고양이들 산책을 위해 시골로 이사했다고 하니 도시에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산책냥이라니!

그런 고양이는 목욕을 즐기는 아이만큼이나 희귀할 것이니 고양이 하네스는 그저 동물병원 갈 때 예민한 고양이를 위한 대비용일 뿐 아닐까 싶다.


한 동물학자는 소심한 고양이는 산책을 통해 활발해지고 자신감이 높아지고 운동량도 많아진다고 긍정적으로 말하면서도 모든 고양이가 다 산책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영역을 중시하는 고양이에게는 그 성향을 꼭 파악해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진리는 냥바냥이라는 것!


동물병원 한 번 가는 것에도 바짝 쪼는 우리 차르는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래도

우리 차르도 종이 상자 속의 세계를 넘어 이렇게 넓은 공원에서 따뜻한 봄 햇살을 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아있다.





SSG 새벽 배송이 도착했다.

사람은 물품을 반기고 고양이는 커~다란 종이봉투에 눈이 반짝인다.


새벽밥 먹고 어디선가 쿨쿨 자고 있을 차르가 뛰어나올까 봐 택배 도착 문자를 받고도 현관문을 열지 못한다.


배송된 우유가 걱정돼 할 수 없이 현관문을 열면 그럼 그렇지! 여지없이 달려온다.


오늘은 우유 6팩, 전장김 3 봉지, 갑 티슈 6개, 주방세제 1개...

물품을 확인하며 하나씩 꺼내는 동안에도 차르는 주위를 맴돌며 봉투 속에 뛰어들 기회를 노린다.

"저리 가~ 니 꺼 없어~"


고양이들은 왜 이렇게 종이 상자와 봉투에 환장할까?

끝없는 호기심 쟁이 고양이! 궁금하지만 이유는 몰라도 그냥 귀엽다.

봉투가 작던 크던 우리 집 온 식구들은 차르에게 즐겨 봉투를 바친다.


종이 상자는 차르의 스크레쳐이기도 하다.

신날 때, 흥분했을 때, 관심 끌 때 뛰어들어가 우리를 쳐다보며 상자 바닥을 사정없이 긁는다.

날카로운 발톱에 종이 상자는 며칠 견디지 못하고 구멍이 날 지경이 된다.

그래서 나의 임무 중 하나는 가끔 마트에서 적당한 종이 상자를 들고 오는 것이다.


오늘의 SSG 배송 종이봉투도 너덜너덜할 때까지 한동안 거실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차르 물건이 가득 차 있어 곧 시작될 사순절 대심방이 걱정됐는데 올해는 줌 심방과 카페 심방도 가능하다고 해서 안심이다.




저쪽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간다.

그 앞에 고양이 한 마리가 쏜살같이 도망간다.

"얘들아 너희들 고양이가 귀여워서 그러는 거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저 길냥이도 상자를 좋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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