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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니카 Sep 26. 2024

드디어 황제로 등극하다

쉽지 않은 까칠 차르 황제


길냥이의 초라하고 비천한 몸으로 오셔서 우리 집 황제로 등극한 데는 사연이 있다.

사연을 얘기하자면 이름을 갖게 된 과정부터 기해야 한다.


황제 칭호를 가지게 되다

아기 고양이는 우리 집에 온 이래 30일이 넘도록 이름이 없었다.

아기야. 야옹아, 나비야, 장군아...  각자 임시로 지어서 불렸다.

하찮게 여겨서 그런 아니고, 사람이던, 동물이던, 사물이던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기에 집사들이 너무 신중하고 결단력이 없는 탓이었다.

의미가 깊고, 흔하지 않고, 부르기 좋고, 듣기도 좋고 거기다 고양이가 알아듣기도 쉬운 이름이어야 한다고 했다.

모든 종류의 괴일 이름, 채소 이름, 온갖 의성어, 의태어가 등장했다. 한자성어, 순우리말 이름도 거론되었다. 아들들이 '원'자 돌림이라 장원, 정원, 소원, 지원...이도 나왔다. '장군'이가 가장 많은 표를 받았는데 결국에는 탈락했다.

전전긍긍하던 차에 작은 아들이 '지자르고'를 제안했다.

게임에 나오는 '고양이 마법사'라나?

사실 이름 짓는데 지치기도 했고 '지자르고'는 그동안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라 일단 모두가 동의했다.

네 자는 너무 길어서 고양이가 못 알아들을 수도 있으니 '자르'라고 하자고 했다가 최종적으로 '차르'로 합의를 봤는데 맘에 들었다.


'차르'는 러시아 황제 칭호였기에 더 맘에 들었다.


공식적인 이름은 차르이지만 '짜루'라는 애칭도 갖게 되었다.

밴드의 우리 고양이 방 이름도 '짜루방'이다.


황제 칭호를 얻었다고 해서 갑자기 대우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가성비 좋은 사료와 간식을 먹고, 큰 형 알레르기 유발 인자라고 구박도 받았다.

알고리즘 탓에 유튜브만 열면 고양이가 나와서 제법 많은 정보를 얻었는데 왠지 우리 차르 황제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9월, 10월, 11월 반,  두 달 반 동안은 서민의 식성과 생활 방식으로 잘 놀고 잘 먹고 잘 잤다.


11월 중순부터 차르 황제는 무슨 이유인지 설사가 잦았다.

처방받은 약을 먹어도 좋아지지 않았다. 우리는 매일 먹이기 전쟁을 치러야 했다.

차르가 화장실만 가면 우리는 밥 먹다가도 쫓아가서 똥을 확인했다.

나는 매일 다 부스러진 똥을 치우며 단한 맛동산 똥이 정말 그리웠다.

'차르야 왜 자꾸 설사를 하는 거야. 뭘 먹어야 하는 거야."

수척해진 얼굴을보면 애가 탔다.

비싼 처방식을 먹이며 '내가 아무거나 막 먹여서 그런가' 하고 괴로워했다.


12월부터는 밤마다 거실문과 주방문을 잡고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꺼이꺼이 울었다

동물병원 담당 의사가 '중성화 수술 하면서 장도 집중 치료하자'고 했다.

12월 26일 중성화 수술할 때까지 한 달 넘게 설사를 해서 설사만 멈추게 된다면 뭐라도 OK 할 것 같았다.



설사로 병원 출입이 잦은 차르 황제


복막염 진단을 받은 차르 황제

중성화 수술 후 며칠 동안 똥이 좋아져서 기뻐했는데, 어느 날부터 놀지도 않고 밥도 잘 안 먹고 구석에 숨고 우울해 보였다.

그리고

설연휴 마지막 날, 급히 찾아간 24시 동물병원에서 혈액검사, 초음파, X-ray 촬영 결과 차르는 '복막염' 의심 진단을 받았다.

이미 흉수가 꽉 차서 많은 양을 천자(바늘을 넣어 뽑아냄)하고 아직 남아있는 흉수 때문에 호흡이 힘들어 산소방에 입원해야 했다.


산소방에 입원한 차르 황제


아픈 차르를 입원실에 두고 무거운 마음으로 큰아들과 나는 저녁 6시에 대전으로 향했다.


중고나라 사이트 딱 한 사람이 올린 '신약'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날 날씨는 정말 추워서 불안함과 추위 때문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약을 받았다.

급히 시동을 걸고 돌아올 때도 한참을 떨었다.

하루라도 빨리 주사를 놔줄수록 살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데 돌아오는 길에 눈보라가 휘몰아쳐서 차가 거북이걸음이라 더 애가 탔다.


밤 11시 40분에 병원에 도착해서 첫 주사를 맞혔다.


그날부터 21일 동안 매일 똑같은 시간에 통원하여 주사를 맞고(대부분 집에서 놔주는데 우리는 도저히 자신이 없어 매일 병원으로 갔다), 63일 동안 경구약을 먹였다.

12주 84일 동안 모든 일정은 차르 약 먹이는 시간 오전 11시를 피해서 짜야했다.

드디어 2023년 4월 17일에 마지막 약을 먹였다.

           

                          *    *   *    *


고양이 복막염은 치사율이 99%라 공포의 질병이라고 하고, 2019년 전까지만 해도 발병하면 거의  죽었다고 한다.

유일한 치료제인 '신약'은 아직 승인 전이라 병원에서는 통용되지 않아 개인이 구해야만 했는데,

그때가 설 연휴라 온 사이트를 뒤져도 구할 수 없는 것을
복막염을 완치시키고 남은 약을 올려놓은 분이 딱 한 분 계셔서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우리 차르에겐 생명의 은인 된 셈이다.


마지막 약을 먹인 후 다시 재발할까 봐 맘 졸이며 애지중지했는데

1년 뒤 2024년 9월 건강 검진에서 간, 신장, 염증 수치 등 모든 것이 정상 범위에 들어오고, 특히 ag수치(혈중 알부민 글로불린 수치) 0.8이  나와 완치판정을 받았다.

(당시 0.4였는데 0.5 이하이면 복막염 의심이라고 한다.)



직장인인 작은 아들은 우리가 대전으로 출발할 때 100만 원을 보내주었고, 큰아들은 매 순간마다 함께 해주었다.

우습게도 큰아들이 그 해 시험에 떨어진 걸 진심으로 감사했다.


완치까지 거액의 돈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살아만 주기를 온 가족이(그렇게 반대하시던 시어머니도) 한마음 한뜻으로 바랬던 시간들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중한 병을 앓고 난

드디어 차르는 우리 가족의 귀하신 몸 황제로 등극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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