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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르 황제와 행운목의 대결

고양이와 행운목, 누가 더 소중할까?

by 모니카
오수를 즐기고 있는 차르 황제


우리 집에는 행운목이 한그루 있다.

아파트 입주할 때 우리가 샀는지 선물로 받았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하여튼 무척 오래됐다.

특별히 보살피지 않아도 굵고 곧은 줄기 양 옆으로 옥수수 잎 같은 초록잎이 빽빽하게 잘 자랐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흙이 말랐을 때 물을 흠뻑 주기만 해도 짙은 초록잎이 윤이 났다.

하지만 이름이 한 몫해서 그렇지, 있으면 좋고 없어도 크게 서운하지 않은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인가 이 행운목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줄기만 여리게 피더니 해마다 그 양이 늘어 몇 해 안에 꽃대마다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폈다.

꽃이 피자 당연히 식구들의 관심이 쏠렸다.

생긴 것도 잘 생긴 것이 꽃도 잘 핀다고 칭찬하기 바빴다. 시어머니는 행운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줄기를 잘라 주는 인심도 썼다.

나도 봄 여름 가을에는 항상 흙을 촉촉이 유지해야 된다고 해서 자주 흙을 만져보고, 먼지가 앉을세라 거의 매일 이파리를 닦아 주었다.

한 번은 굵은 줄기 밑동에 아주 작은 벌레들이 오물거리는 걸 보고 기겁을 해서 나도 모르게 밑동 껍질을 헤치고 살충제를 사정없이 뿌렸다. 벌레들은 없어졌지만 독한 살충제 때문에 행운목이 죽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물을 뿌리고 수건으로 닦고 시든 큰 잎을 떼어내서 정성스럽게 벗겨진 줄기를 말고 실로 감아주었다. 그리고 별일 없나 매일 확인했다. 그렇게 애지중지했다.


이름에 못지않게 꽃향기도 한몫했다.

5월의 라일락이나 아카시아꽃 향기가 이만할까?

그것들이 은은한 향이라면 행운목숨 막히게 좋은 향이다.

더구나 그 향기가 좁은 실내에만 머무니 짙기로 말하면 몇 배 더 짙었다.

낮에는 다물고 잔뜩 오므리고 있다가 해가지면 못참겠다는 듯 팡 터지는데 그때부터는 온 집안 가득 퍼진 향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너무 향이 진해서 그 향기를 모아 놓았다가 일 년 내내 조금씩 꺼내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우리 가족은 밤에만 활짝 피는 행운목에게

'너 때문에 자다 질식하겠다'라고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해마다 한 번도 아니고 5월과 12월 두 번이나 어김없이 꽃을 피워, 깜깜한 밤하늘 폭죽 같은 모습으로 우리 식구 핸드폰 갤러리를 장식해 주었다.

탐스러운 꽃이 특별한 행운을 가져다줄 것처럼 온 가족은 괜히 기대를 갖고 즐거워했다.

두 아들 대학 입학, 군악대 합격, 취업과 같은 큰일은 물론이고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것도 다 행운목 공으로 돌렸을 거다.


만개했을 때는 행운이 주렁주렁 달린 것처럼 좋아하다가, 시들어 가는 것을 보면

'늙은 것이 한 해에 두 번이나 피워줘서 고맙다'며 짠해했다.


어느새 우리 가족 모두 행운목이 '우리 집 보물 1호'라고 생각했다.


5월에 어김없이 가지마다 늘어지게 꽃 피웠다가, 꽃이 다 지고 나니 다산한 어미개처럼 힘없이 늘어진 것을 영양제와 새 흙을 듬뿍 주어서 회복시켜 주었다.

한참 원기가 회복되는 중인데, 9월 어느 날


아기 고양이 차르나타났다.


베란다에는 난과 게발선인장, 그리고 또 다른 식물이 있었는데도 차르는 행운목만 집중 공격했다.

잠깐 한눈팔면 벌써 기둥을 타고 올라가 나무를 점령하고 있었다.

차르를 떼어내려다 날카로운 발톱에 우리도 긁히고, 싱그러운 잎은 죽죽 상처가 나고 이제 막 새로 나오는 새순은 똑 잘라졌다.


-아이고 요놈! 행운목 그만 좀 괴롭혀!


우리는 행운목이 다칠까 노심초사하여 '고양이 나무 공격 방지법'을 폭풍 검색했다.

그리고 화분 위를 온통 강력 양면테이프로 칭칭 말아 놓았다.

처음에는 발이 쩍 붙자 깜짝 놀라 물러서더니 곧 껑충 점프해서 더 심한 상처를 냈다.

미운 일곱 살처럼 말릴수록 더 심해져서 틈만 나면 행운목 주변을 맴돌며 뛰어오를 기회를 노렸다.

행운목이 말할 수 있다면 두 보물들의 싸움소리에 집안이 온종일 시끄러웠을 거다.


그래도 행운목은

찬기가 느껴질 때쯤 제일 먼저 따뜻한 실내로 모셔졌다.

차르는 더 신나고 행운목의 수난은 가혹해졌다.

마침내 행운목은 머리까지 비닐이 씌워지고 비닐 바깥은 끈적한 테이프로 둘러쳐졌다.


"차르야, 너도 소중하지만 얘도 귀중해!"

이렇게 말할 때만 해도 행운목은 그의 견고한 지위를 유지할 줄 알았을 거다.


어느 날

'고양이에게 해로운 식물'로 행운목 꽃이 거명되었다.


백합과와 진달랫과, 미나리아재비과 등은 고양이 생명과 직결될 정도로 매우 위험도가 높다. 백합과는 꽃가루에 닿거나 꽃병의 물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
무리 지어 피는 흰색 행운목 꽃은 개나 고양이에게 치명적일 수 있으니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행운목: 백합과



아! 어쩌면 좋을까?

우리 가족은 행운목이 꽃을 피울까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꽃이 피면 어떻게 하지?

복도에 내다 놓을까? 아님 누굴 줘야 하나?


너무 시달려서 그랬을까

행운목은 12월이 다 가도록 꽃을 피우지 않았다.


아니 그 해 12월부터 2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꽃을 피우지 않는다.


고백하자면 나는 '정말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행운목은 손길만으로도 속내를 알아차렸음이 틀림없다.


그사이 차르도 아팠다.

차르는 회복됐지만

행운목은 이제 꽃 피울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지금

베란다 제일 구석(키가 제일 큰 탓이라고는 하지만 원래는 가운데 있었다)에 입을 꽉 다물고 서 있는 행운목에게 나는 가끔 물을 주며 말한다.


'너무 우울해하지 마~ 너도 사랑해. 차르는 많이 아팠잖아~


그리고 속으로 또 말한다.

'꽃은 이제 안 피워도 돼~'


행운목 꽃말이 '약속을 실행하다'라니!

혹시 내가 '변치 않고 사랑할게'라고 약속하지 않았을까 고민이다.

그랬더라도 이해해 주렴. 네 예쁜 꽃이 차르한테 해롭다잖아.

앗! 그런데 너 혹시 차르 때문에?


무거운 MTB 자전거가 기대고 있는 행운목




차르와 행운목의 대결은?

행운목은 섭섭하겠지만 차르의 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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