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2

기억 1

by 해나 이미현

이 커피 한잔을 선뜻시키지 못한 날들이었다.


좋아서 내가 먼저 청혼을 하고 비용 절감을 위해 무료로 진행해 주던 대학교 축제 때 사회과학부 행사의 일환으로 치르던 전통혼례로 결정한 것도 내가 선택한 일이었다.


그는 복학 후 졸업반 학생이었고 나는 3년 차 직장인 동갑내기, 우리 둘의 가정은 그리 시작했다. 가족을 만든 날이었다.


부모님은 셋째 딸이어서 청첩을 가까운 친지에게만 돌렸고 5월 학교 축제날 결혼식장인 대운동장과 허름한 빈 강의실이었던 신부 대기실은 공단 혼례복을 입기엔 더운 날이었다.


식 시작 시간이 오후 2시가 임박해도 신랑은 나타나지 않아 조바심이 났었는데 전날 친구들과 총각파티로 술을 먹고

신랑 측 음식 준비로 어시장에 회 맞춤한 걸 찾으러 가기로 했던 친구가 고주망태가 되어 신랑이 직접 버스를 타고 회 찾으러 다녀왔다고 했다.


지각생 신랑의 혼례복엔 허리끈도 없어 친구의 넥타이를 풀어 묶어 대신했다.


핸드폰도 없던 그 시절의 일이었다.


신부 화장과 올림머리는 학교 앞 미용실 원장님의 손길에 태어나 첨으로 촌부가 어설픈 화장을 한 것 같은 얼굴의 신부 화장이란 걸 하고, 말을 타고 입장을 하기로 했던 신랑은 말을 빌리지 못 해 걷고, 내가 탈 가마는 한지가 조금 찢긴 채 당일 급조한 가마로 학생 가마꾼들 넷이 너무 무거운 가마 무게에 끙끙대며 신부를 태워 입장했다.


신부를 돕는 도우미도 학생들이고 이런 게 첨이라 절 시중이 어설프자 신랑이 번쩍 들어 신부를 일으키며 절하게 되어 큰절에 철푸덕 엉덩이가 무거워 일어나지 못하는 신부처럼 보일 웃지 못할 해프닝이 계속이었다.


그 시절 대학교에서 그런 결혼을 하면 친정집이 있는 시골에서는

"아이고 데모꾼 하고 결혼했는가 보다"

"혼수(아기) 생긴 거 아니가?"라는 의심의 입방아를 찧어대어 부모님 속은 속이 아니었다고 이후 듣게 되었다.


결혼식을 그리 얼렁뚱땅 마치고

강원도에서 버스 대절로 오신 시댁 식구들과

손님들을 위해 맞춰 온 회와 교내식당 100원짜리 잔치국수로 대접하고 친정 부모님께서 마련해 주신 버스에 실은 수육이며 떡 등을 실어 배웅했다.


뒤풀이는 학교 축제장에 차려진 동아리 주막에서 파전과 동동주를 마셨다. 친구들은 몹시도 짖궂었고 술을 못마시는 남편은 취기 가득한 얼굴이 되어 얼굴이 불타올랐다.


그리고 방금 결혼한 티를 팍팍 내는 올림머리 핑크색 정장을 한 누가 봐도 신부 차림과 어설픈 양복차림(그 때는 다 그리 떠나는 거라 여겼다. 생각없이 요사이 청년들은 자기 생각대로 그들의 방식으로 바꾸고 행하는데 말이다. )을 입고 앉아 양양으로 떠나는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7시간 달려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리 결혼하지 않으면 못할 거 같았다.

대학 2학년 10월에 만나

5년 반의 연애 중에 우리는 그리 부부가 되었다. 26살 동갑내기 어린 부부의 철없는 가정 만들기는 그리 시작 되었다.


아무것도 없던 가난한 자취생 강원도 광부의 아들로 2남 5녀 중 유일하게 4년제 대학을 처음으로 올 수있었던 넘자. 석탄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가며 대학교 생활을 하던 남자와 시작한 결혼 생활은 좋아하던 수제차 한 잔을 사 먹지 못하는

처음으로 맞는 가난한 생활이 8년간 계속되는 날들이었다.


그 시절 다이어리 속에는

5000원만 더 있으면 좋겠다는 글귀가 있다.

가난이란 걸 결혼하고 처음 경험했다.

동창 친구들이 "너네 집은 부자잖아. "말하듯 부자는 아니었으나 식당을 꾸리며 성실하게 일하시는 부모님 덕에

가난하지는 않았었다.


월세 단칸방 둘이 누울 요가 접힐 정도의 좁은 방에서 내일 끼니를 걱정할만큼

가난했지만 따스했고 포근했던 날들이었다.


버는 돈은 모두 매일 찾아오는 배고픈 친구들과 동아리 후배들로 매 번 장을 보고 파전을 굽고 상을 차려 내며

월 평균 25일 손님을 치루며 저축은 되지 않았자만 꼬순내 진동하는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번개사장에서 1000원에 2개 하던 앞니달린 감자요정 컵을 사면서도 황실 티 잔이 부럽지 않을 그득함이 있었다.


#기억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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