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뭐 제 허락도 없이 방으로 쳐들어와 침대를 제 것처럼 쓰기 시작했어요. 하교하고 집에 오면 침대가 털 천지라니까요. 창틀에서 저를 감시하다가 졸리면 창틀에서자고는 해요. 어찌나 위험한지. 내보내면 방문밖에서 문을 열라고 고성방가 행위를 하지 않나. 화장실에 억지로 들어와 샤워하는 모습이나 볼일 보는 모습을 지켜보질 않나.못 들어오게 하면 화장실 문 앞에서 무한 대기하고 고성방가 해요. 집사가 잠들면 잡기 놀이를 하자고 계속 제 방 앞에서 운다고요.
무시하면 되지 않나요?
에 어떻게 그런. 물론 가끔 늦게 열어주기는 했지만. 요전 날은 책상에서 책장 꼭대기로 이동하다가 떨어졌다고요. 얼마나 놀랐는지. 몸을 이리저리 벽에 붙이며 공기저항을 이용해서 착지하더군요. 날 다람쥐처럼 하는 줄 알았더니 (실망한 기색)
헉 그걸 그냥 뒀어요. 잡아줘야죠.
쓰읍 잘 내렸다고 했잖아요.
공부할 때 책상에 올라와서 방해하고 그래요. 너무 방해가 돼요.
공부하기 싫어서 하는 핑계는 아니죠?
아 아니 아니거든요.
두 번째 호소인(17세 모 고등학교 1년)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제 방을 자기 방처럼 드나들어요. 가끔 책상 위 인형이 떨어져 있거나 물건들이 이동돼 있어요. 책상 아래 서랍 사이 공간에 숨어서 계속 절 감시해요. 정작 만지려고 하면 도망간단 말이에요. 요즘은 책장 위에서 거의 하루종일 머물면서 절 감시해요. 신경 쓰이죠. 제가 없는 시간은 줄곧 제 방을 제 것처럼 쓴대요. 날 너무 좋아하나 봐요. (뿌듯해하며)
물건 떨어진 것 이외에 피해는 없나요?
뭐 네 현재까지는 그래요. 참 옷장에 올라가거나 제 옷에 털을 많이 남겨요.
피해를 접수하시면 고소하실 수 있어요. 방에서 나가라고 퇴거 명령을 할 수도 있고요. 하시겠어요?
에 아니오 그건 안 돼요. 뽀뽀하게 좀 가만있으면 좋겠어요.
괴롭히심 안 돼요.
이 두 피해호소인들은 뭐 매일 이런 불평불만이지만, 정작 제리를 격리할 어떤 행동도 감행하지 않는다. 그저 불만을 위한 불만을 제기할 뿐이다.
그러나 마지막 피해 호소인은 제법 강력한 한 방을 가진 존재(가장이라는 직위)라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세 번째 피해 호소인(50세 IT업계 종사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우선 털이죠. 옷장에도 수시로 드나들고 그래서 검은 옷은 아예 못 입죠. 이게 붕붕 날아다녀요. 거실 바닥이 흰색이라 잘 안 보이지만 옷에 다 붙어요.
그것 말고요. 감시 피해를 받고 있나요?
감시라뇨. 절 감시한 적이 없어서.
화장실에 따라온 적이 있어요?
없어요.
지켜보는 느낌은?
없어요.
아... 그러시군요. (무안한 표정)
아
뭔가 있군요.(반가워하며)
아 골프 가방을 베란다에 두는데 거기가 주로 있는 곳이죠. (냥플릭스 창문 때문에 머무는 안방 베란다) 제가 가면 자꾸 달아나 버려요.
그렇군요(슬픈 음악 깔아야 할 듯)
물론 최대 피해자는 집사인 나다.
하루를 돌아보면 잠이 든 시간을 제외하고는 매번 날 찾아다니는 녀석이다. "엄 마" 부르기도 엄청 불러댄다. 어디를 가든 지켜보고 있다. 집사가 뭘 하는지 그렇게 궁금한 모양이다. 컴퓨터를 할 때도, 음식을 할 때도, 샤워를 할 때도 빨래를 할 때도 어디선가 나타나 지켜보고 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앉아 감나라 배나라 하는 제리를 볼 때면 귀찮다기보다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호기심이 많은 제리는 집사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한 모양이다.
가족들 중 유독 남편과만 데면데면한 사이다. 그렇게 알고 있었다.
고양이를 키우겠다고 했을 때도 남편은 반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양손을 들고 반기지도 않았기에 털문제를 말한다거나 매 달 병원을 데려다준다거나 하는 부분에서 눈치가 보였다. 고양이 용품을 사는 부분도 눈치를 많이 봐야 했다. 특히 캣타워의 경우 가격도 가격이지만 거실 창가를 떡 하고 막았을 때 눈치가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 제리에게 청소년기 캣타워가 좀 낮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요즘 부쩍 책장 꼭대기에 올라가 지내고 있다.
캣타워 교체시기가 드디어 도래한 것이다. 폭풍 검색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남편 눈치보기는 계속된다.
남편과 제리의 관계에 대한 짧은 에피소드를 하나 풀어본다.
남편과 나는 수면 패턴이 달라서 남편은 소파에서 TV와 연결되어 있는(누가 봐도 자는 시간인데, 켜두어야 하는) 시간 동안 나는 먼저 안방에 자러 간다. 보통 새벽에 그 이상한 연결을 끊고 잠자리로 와서 잠이 드는 모양이다. 유추해 보길 그렇다. 아침에는 침대에서 발견되니 그렇다는 거다.
새벽이었다. 잠결에 누가 대화중이었다.
"왔어?"
뭐지. 화장실에서 남편의 목소리.
유튜브를 보나 하고 다시 잠들려고 하는데
"너 뭐 닮았는지 알아?"
그제야 화장실 앞에 앉아 있는 제리가 보였다.
"너 백 호랑이 닮았어. 그래 백호 닮았어. 너 백호 알아?"
남편은 안방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문을 반쯤 열고는 화장실 앞까지 따라온 제리에게 꿀 떨어지는 어투로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제리는 대답하고 있지 않았다. 이 사람이 왜 친한 척하지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앞에 앉아서 남편의 술주정을 다 받아주고 있었기에 뭔가 이 둘 사이에도 싹트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남편은 술을 마시고 늦은 귀가를 했기에 아마 술김에 그런 것이라 생각하지만, 데면데면한 척 해도 귀여워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