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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숙집 고양이 Sep 11. 2024

친애하는 내 고양이님에게

제리에게 보내는 글

제리가 두 살.

그리고 우리 집에 온 지도 1년 반이 넘었다.

처음 정말 아무 준비도 없이

집사가 되었다.

사실 계획적인 면과 즉흥적인 면이 결합된

사람이기는 했지만

고양이와 함께 삶을 살아갈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모든 것이 서툴렀다.


요즘 드는 생각이지만

제리가 없었다면

내가 갱년기라는 거대한

산을 잘 넘어올 수 있었을까

물론 지금도 넘어가고는 있다.


고마운 마음과 더불어

불안한 마음도 든다.

앉은 거니 누운 거니

우리는 아니 나는 정말

좋은 집사인가.


감정기복이 심한 시기라

난 가끔 몹시 날카롭다.


별 일도 아닌 일에 감정이 끓어올랐다가

또 식을 때는 한 없이 식는다.

감정을 가라앉히는 것은 보통 제리다.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제리는

어딘가 자신의 공간에 머물렀다가

순간 다가온다.

먀아하고

제리는 날 부르며 나타난다.


그 소리는 내게 마음을 가라앉히라는 신호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그 소리만 들으면 난 웃음이 나기 때문이다.

절로 웃음이 난다.

집사야 내 상자 내 놔라

꼬리를 한껏 하늘로 치켜들고 요염하게 등장해

다가오는 제리를 보고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나.


그렇게 제리와 나는 이 질풍노도와 같은 감정의 파도를

함께 넘고 있다.

이 작고 연약한 너를 의지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부족한 집사는 그런 너를 의지하며 이 시간을 견디고 있다.


친애하는 제리에게
맨 처음 너를 봤을 때
사실 난 널 선택할 생각이 없었어. 왜냐면 넌 그레이 색이었고, 또 너무 작았어.
그때 난 흰색(딸내미 픽)이나 인절미 색(아들내미 픽) 고양이를 보고 있었거든.
신기하게도 넌 그런 내 맘을 알았던 건지.
절박했던 거야. 그래서 먼저 손을 내밀었던 너를 난 거절할 수 없었어.
그게 지금 생각해도 너무 미안해.
난  내가 선택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묘연이라는 건 그런 것이 아닌데.
날 선택한 건 너였어.
우리를 따라오고 싶어 난리를 치던
너를 떠올리면 웃음이 나면서도
미안해.
얼마나 절박했을까
그 쪼그만 몸으로 진열대를 뛰어내려
넌 목숨을 건 거나 마찬가지였어.
그게 날 돌려세웠지.
넌 바로 알아봤던 거야.
 너와 내가 함께 돌아갈 거란 걸.
첫날 집에 오면 보통 상자에서 나오지 않고
공간을 가린다고 하던데
넌 이미 차 안에서 나왔고 내 품에 안겼고
집에 와서는 온 집을 돌아다니며
신나 했지.
그 신중한 제리가 말이야.
제 집이라는 걸 알았던 거야.
그렇게 넌 쑥쑥 자라 두 살이 되었구나.
생일 정말 축하하고
세상에 태어나 줘서 너무 고맙고
낳고 두 달 만에 너를 보내야 했던
너와 똑 닮은 네 엄마 고양이에게도
너무 고맙다.
우리 곁에서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내가 더 노력할게.
사랑해. 제리야.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자.
너를 가슴으로 낳은 집사로부터


이렇게 편지도 쓰고 생일 장식품도 사고 고깔도 사고 츄르도

준비했더랬다.

그렇게 아름다운 생일파티가 될 거라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다.


시작은 장식품에 관심이 충만했던 제리가 금박으로 된

장식 커튼을 물어뜯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게 그렇게 약할 줄 몰랐는데

커튼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너덜너덜한 금박 커튼을 어떻게든 벽에

양면테이프를 이용해 부착해야 했는데

의자에 올라서면서 제리가 물어놓은 부분을

밟은 것이 실수였다.


부악 하고 다 찢어지더니 붙여 놓은 부분이

아주 걸레가 되어 지저분하게 걸렸다.

빠른 포기.

결국 금박 커튼은 재활용 통으로

보내졌다.

생일 카드를 리본에 연결해 달고

제리를 겨우 안고

고깔을 씌우는 데까지

성공.

인증 사진을 남기고

고깔을 벗겨주려는 데

겨우 건진 사진과 뒤에 떨어지는 생일 카드

소스라치게 달아나 버리는 제리.

결국 고깔은 턱에 걸리고

목이 졸려 패닉에 빠진

제리를 잡아 고깔을 풀어주니

소파 뒤로 숨어 나오지 않게 되었다.


대체 이게 뭐라고

원님도 제 싫으면 끝인데. 생일이 뭐라고 제리를 저 지경을 만들었는지.

감정이 급격히 올라왔다.

카드도 다 고 생일 파티 중단.

미안한 마음이 또 잘해보려고 했던 생일에 대한 미련으로

침울해졌다.

화가 잔뜩 난 제리

보통 그런 일을 겪으면

반나절을 도망 다니는 데

미안하다. 제리야.

내년에는 그냥 츄르와 간식만 충분히 준비할게.

부족한 집사라 미안해. 생일 진심 축하해.

쪼꼬미 시절 제리(핑크체크는 내 잠옷. 제리 머리에 니트는 내가 뜬 제리 머플러)

그리고 제리 생일을 함께 축하해 주신

랜선집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머리 쓰담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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