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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재직 중인데 이메일 삭제라뇨

권고사직을 당하다

by 글쓴이

이메일 계정을 삭제당했다.

귀찮아서 백업을 미루고 있었고, 일주일 전부터는 메일을 보내지도 않았다.

단, 회사 클라우드 서비스는 이메일 계정으로 로그인되어 있고 그 안에는 개인폴더도 있다

개인폴더의 자료마저 백업을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도 회사를 마지막으로 나갔을 때 한번 백업을 해놨더라.

하지만 이 상황이 너무나도 황당해서 아침부터 화가 났다.


나 어제 사장님한테 물어봤는데 바로 이렇게 삭제당하나?

나 아직 재직(휴직) 중인데??


관리부 차장에게 연락했다.

제 메일 삭제하셨나요?

사장님께서 퇴사자 메일 계정 삭제하라고 해서 삭제했습니다.

저는 이전 퇴사자들과 달리 아직 재직 중입니다. 그리고 삭제하실 거면 이야기라도 한번 해 주시지,,

회사 자료를 접근하는 게 아니고 그 안의 내 개인폴더만 보는 것이라 설명하고

회사 참 허무하고 섭섭하다고 하니 그제야 자기가 뭘 도와줄 수 있냐고 묻는다.


이메일 계정 복구 해 달라고 했고, 클라우드에서 내가 회사 자료 백업할까 봐 걱정이 되면 접근 불가 처리를 하면 된다고 이야기해 줬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클라우드는 내가 관리자로 만들어서 1년 이상 세팅 후에 회사 전체로 깐 시스템이다.

내가 만들고 내가 쫓겨났다.

스티브 잡스야 뭐야..


그리고 중간 사장님께도 장문의 메시지를 드렸다.


박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 오늘 기준으로는 아직 휴직, 재직자 아닌가요?

이메일 계정이 어제 부로 삭제되는 바람에 드롭박스의 개인폴더를 백업하지 못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제가 행여 어디 유출을 한다거나 회사 자료 가져가서 뭐에 쓰나요?

먼저 알려주고라도 삭제해야지 맞는 것 아닌가요?

진짜 회사 너무하시네요. 저는 끝까지 좋게 나가고 싶었는데 제가 무슨 짓을 할까 염려가 되는 것인가요?

어제 강사장님과 통화하면서 이메일 계정 좀 잠시 쓰면 안 되겠냐고 여쭸더니 안된다고 하셔서 알겠다고 하고 안 썼습니다. 그런데 바로 인지 없이 삭제하라고 지시하셨더라고요


내가 무슨 상황인지 좀 알아보고 연락할게요..


음..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가도 연락이 없다.

관리부에 따로 물어봐도 아직 복구 중이라고 한다.

내 귀차니즘 때문에 생긴 문제니 누굴 탓하나

18년을 내 열정과 의리를 바친 회사가 맞나 싶었다.

너무 화가 난다.

그래도 속으로 참고 있다.



누구는 나랑 별로 친하지도 않았지만 염치 불고하고, 연락해서 이직 자리 소개해 주는데

정작 우리 회사 사람들은 (특히 남자 임직원)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둥, 잊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둥.. 쓸데없는 말만 한다.

그리고 나를 남보다 더 못한 취급으로 몰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깔끔하게 나오고 싶어서, 전체 메신저로 전체 인사를 드리고

권고사직받고 이틀 만에 회사를 나왔다.

어떤 이는 나의 메시지를 보고 자진 퇴사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인데

알았다고 해도 나는 어쩔 수 없었겠지만

모르는 척, 어쩔 수 없는 척,

이런 게 진짜 사회인 거였다.

한 번 당했는데 또 당했다.

1년 다니고 권고 사직 당하나 18년 다니고 권고 사직 당하나 의미 없다.

나는 회사의 주인이 아니었다. 나만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했나 보다.


내 폴더만 복구되길 기다린다. 오늘 안에 끝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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