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독감
12월이 돼서야 맞이한 늦겨울은 추위를 타지 않는다는 나의 자부심을 순순히 짓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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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1월은 작년 패딩을 입고 있는 사진의 내가 어색할 정도로 춥지 않았다. 늘상 옷차림은 맨투맨 혹은 니트 한 벌. 왼팔은 자동으로 겉옷 옷걸이가 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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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4학년, 마지막 캠퍼스 생활과 기말시험을 앞둔 나는 왠지 모르게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다가올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대학생 신분으로 살아갈 “단 일주일의 시간“을 남겨두고 12월 어느 날, 엄청난 풍속으로 돌진하는 감기 토네이도를 온몸으로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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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를 맞이한 첫날 고통은 목부터 시작되었다. 다음날 시험이 있었기 때문에 병원은 필수였고 항생제 한 움큼을 목구녕에 쑤셔 넣은 뒤, 워킹데드 좀비에 빙의해 학교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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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친구들과 보낼 시간도 이 시간이 지나면 현저히 적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에 이번 감기가 더욱 미웠다. 좋지 않은 컨디션을 더 최악으로 몰고 가고 싶지 않았고 결국, 놓쳐버린 시간은 뒤돌아보지 않고 매정하게 떠났다. 이에 동반되는 스트레스는 펑펑 내리는 눈처럼 내 가슴 한 켠에 수북이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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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연명하는 코에 달린 호스처럼 감기약은 나에게 호스였다. 고통이 줄면 정신줄을 가지고 발을 묶은 뒤 마리오네트 인형 마냥 나를 조종하기 시작했고, 손가락을 움직여 양 발을 시험장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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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 깨어나기를 반복. 온갖 약품으로 죽은 몸을 일으켰고 혈색 하나 없는 피부와 말라비틀어진 입술, 누렇다 못해 검게 변해버린 다크서클까지. 좀비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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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가 되어 대학교를 마친 나는 안락한 집으로 돌아왔지만 한 번 좀비가 되어버린 모습은 원래의 모습으로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목에서 시작된 고통은 코로 전해졌고 엎친데 덮친 격, 눈까지 전염되었다. 결막염으로 다 터진 실핏줄과 빨간 눈은 완벽한 좀비로 거듭나기 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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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좀비로 산 지 일주일. 거울 앞에 나는 씻지 않아 사방으로 떡진 머리에 빨간 눈, 떨어진 면역력은 이때다 싶어 입안 가득 구내염을 키웠다. 온몸에서 터져 나오는 병균들. 코로나에 걸려봤지만, 이놈들 코로나 보다 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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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2주 차. 드디어 몸에서 백신을 만들어낸 듯하다. 물론 무기력증과 심각한 체력저하라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점차 얼굴에 혈색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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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가 되어 본 기분은 썩 좋지만은 않다. 가족들과 친구들이랑 보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많이 놓쳐버렸고, 좋아하는 떡볶이와 탄산음료를 마시던 일상생활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아무런 감정 없이 고통만으로 가득했던 이 시간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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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빌어먹을 코로나.
올해 말, 좀비 같은 독감까지.
크나큰 전쟁 두 차례를 치른 내 몸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렇게 아팠으니 내년에 좋은 일이 있으려나 합리화해보는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