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아닌 시작일까
덩치보다 큰 책가방을 짊어지고 한 손에는 신발주머니를 요요 마냥 휙휙 돌려댔던 초등학생을 지나,
짧은 교복 치마와 어울리지 않는 주황색 틴트, 공부와는 담을 쌓았던 중학생에서
책가방이 아닌 기타 가방을 들쳐 매다 현실이라는 거대한 벽에 깔려 산소를 잃어가던 순간 중국어라는
틈을 찾아 극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고등학생까지. 나의 학창 시절은 그렇게 끝이 났다.
-
꿈은 잠에서 깨기 전, 단 몇 초 동안 꾸는 것이라고 한다. 막상 꿈속에서는 몇 시간 아니 며칠이 흐른 것 같지만. 그렇게 또 생생하고도 강렬했던 꿈이 몇 시간 뒤 기억도 나지 않은 채 몽땅 사라지는 걸 보면 정말 허무하다.
학창 시절이 마치 나에게는 꿈만 같다. 눈 감았다 떠보니 사라져 버려 다시 되돌아갈 수 없듯이.
-
20살에는 멋있는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으며 커리어우먼이 되어있을 나를 상상하면서 어른이 되기 바랬다. 하지만, 막상 20살이 되어보니 예전의 상상은 온대 간데없고 전혀 다를 것 없었던 지금 내 얼굴과 높은 구두가 아닌 평평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대학에만 들어가면 인생이 끝일 줄 만 알았던 철없던 20살. 대학 졸업을 앞둔 지금에서야 느끼는 거지만, 안일한 생각임이 그지없다.
-
나이만 23이지, 영락없는 13살이었다.
소심하고 미리 염려하고 걱정하며 두려움이 많은 나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렇다 보니 코로나가 터지고 모든 학교생활이 셧다운이 되었을 때,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더욱더 뒤로 숨었다.
“코로나 때문에 못 해봤어요.”, “코로나 때문에 못 가봤어요.”라는 합법적이고 그럴싸한 명분이 생긴 것이다. 커다란 바위 뒤에 2년 동안은 무사히 숨어 지냈지만, 바위도 시간이 지나자 닳고 닳듯, 작아 없어져 내 형태가 다 드러나게 되었고, 울상을 한 채 나와보니 4학년이 되어버렸다.
-
대학교 4학년.
“4”라는 숫자가 가진 힘은 대학교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다. 1학년들은 4라는 숫자만 보면 기겁하듯 도망을 가고, 혹여나 학교 활동에 참여하게 되면 모두가 불편해하며 영락없이 눈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더불어 4학년들 얼굴만 보면 측은하게 바라보는 교수님들까지. 학교 내에서는 철저히 신분을 숨기고 다녀야만 했고,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나이대에 서있었다. 훌륭하게 조기 취업을 하고, 학생활동 경험과 수상경력도 많으며, 짱짱한 스펙을 가진 4학년이 아닌 나는 적어도 그랬다.
-
2달 뒤 졸업장을 받게 되면 나의 도피 명분이었던 학생 신분이 이제는 수명을 다하게 된다. 태어나서 지금껏 달려왔던 학창생활도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끝”.
12년 + 4년 총 16년의 안락했던 학창생활을 내려놓고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냉혹한 사회로 발걸음을 옮길 차례다.
-
끝물이 되어 크지 못한 앙상한 열매가 아닌, 끝물 포도로 만들어진 달달한 와인이 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