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갔다 올 때까지 청소 다 해놔”
엄마가 외출하는 날이면 당시 잉여 인간이었던 나에게는 청소 하달이 떨어졌다.
맥시멀 라이프를 지향하는 엄마였기에 정리를 한대도 딱히 차이점은 느껴지지 않건만, 왜 매일 그렇게 청소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세상에 이해 가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해를 위해 애쓰기보다 잔소리 폭탄을 피하는 것이 오히려 녹록한 세상살이가 될 수 있음을 일찌감치 깨달은 나였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세상 이치와 적절한 타협이 필요했고, 어차피 해봤자 티 안 나는 청소에 시간과 정성을 할애할 여유가 없었다. 대충 눈에 띄는 것만 정리하고 엄마의 자취가 느껴지는 부분만 중점적으로 청소기를 돌린 뒤, 젝스키스 오빠들의 무대 리뷰를 위해 얼른 가요톱 10 오프닝이 흘러나오는 TV앞에 자리했다.
“왜 물걸레질은 안 했어!!!”
할 말이 없다. 엄마가 바짝 말라붙은 걸레를 들이미는데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행동을 후회하며 ‘다음엔 그러지 않겠노라’ 굳게 다짐했다.
동네 아줌마들의 회동이 있다며 엄마가 또다시 집을 나서던 그날.
왜 아줌마들은 하필이면 가요톱 10이 하는 날, 그 시간에 정기회동을 갖는 건지.
아무튼 청소기를 후다닥 돌리고, 엄마 손에 짜인 그대로의 걸레를 집어 들어 물을 흩뿌린 뒤, 바닥에 고이 뉘었다. 완벽한 퍼포먼스에 어깨가 한껏 으스대며 우쭐거렸다.
열쇠가 돌아가며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두근두근, 엄마가 왔다.
“이게 뭐야!! 어디서 이런 꼼수를 쓰고 있어!!”
엄마가 내 얼굴 앞에서 걸레를 활짝 펼쳐 보였다.
그 형태는 마치,
미술 시간에 물감으로 만든 어설픈 나비 데칼코마니 같다고나 할까.
걸레를 샤워기로 보이는 곳만 뿌린 탓에 스며든 부분만 군데군데 물기로 젖어있었던 거다.
엄마 내부에 적재된 잔소리 TNT가 물걸레질을 안 했을 때보다 더 무자비하게 터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또 펼칠 생각까지 했지...? 그냥 보기엔 완벽히 젖어있었는데...
아무래도 엄마는 한국의 유리겔러가 틀림없어...’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강산이 몇 번 바뀌자, 수포자인 내가, ‘3차 방정식 근과 계수의 관계’보다 이해하기 어려웠던 엄마의 모습으로 어른이 되었다는 거다. 그나마 다른 거라곤 투시능력자인 유리겔러가 아닌, 전지전능한 오감을 가진 드라마 ‘무빙’의 이미현..이라는 거..?
오랜만에 주말 외출을 하고 돌아오자, 분명 청소기를 돌렸다고 말하는 남편의 동공이 확장되고, 부자연스럽게 발로 바닥을 훔치는 등, 이상행동이 포착됐다. 결국, 온몸의 감각을 극대화하기 위해 양말을 벗고 맨발로 방바닥을 즈려밟아본다. 걸음마다 발바닥에 꽂히는 부스러기, 비글 자매의 입가에 채 털어지지 않은 흔적들, 소파 쿠션 뒤를 황급히 뒤져 보면 빼박 증거물인 과자봉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남편은 체념한 듯 한마디 한다.
“대충대충 살자~”
한량을 꿈꿨던 타고난 기질보다 노출된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였기에 어쩔 수가 없다.
때때로 숨 막힐 정도로 FM 스러운 게 나의 단점이자 장점인 것을.
항상 그런 내 모습에 답답해 마지않던 남편과 달리 입사한 회사에서는 반전 대우가 일어났다.
초반에 딱히 정해진 업무가 없던 내게 던져진 것은,
제작물 최종 버전의 오탈자 검수.
매가 사냥하듯 예리하게, 그동안 갈고닦은 오감을 총 동원해, 신중히, 철두철미하게.
(사실 오탈자 검수 외엔 그때 다른 업무가 없었다.)
“이햐~ 강대리, 진짜 잘 찾네!! 좋아, 좋아!!”
모두가 무심코 흘려버린, 중요한 숫자의 오타까지 잡는 내게 무한 칭찬이 내려졌다.
오죽하면 임원에게까지 보고가 됐고, 입사 후, 처음 받는 업무적 칭찬이 얼떨떨했지만, 집안일이 아닌 사회에서 받는 인정에 감격스러웠다. 칭찬은 강대리도 춤추게 한다고, 더 열심히, 더 최선을 다한 결과 여러 번 중요한 순간을 포착할 수 있게 되었고, 다들 오탈자만큼은 나를 전문가로 보는 듯했다.
그런데 이제 나의 주된 업무가 생기고, 그것이 과중되는 순간에도!!
오탈자 검수만큼은 내게 최종 확답을 받고 싶어 한다는 데서 문제가 생겼다.
종일 50통에 달하는 전화 통화를 하며 광고주와 타 대행사와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나의 마지막
“확인했어요”라는 말 한마디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그들을 위해 결코 거를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연속통화로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는 바다로 돌아가기 위해 왕자의 심장을 겨누지만, 어떤 오류 때문인지, 거북이가 되었다.
인어의 꼬리도, 목소리도 얻지 못한 채...
거북이는 혁신적인 의료기술의 발달에 기대하며 엉금엉금 기어 병원을 방문해 보지만,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완전한 거북목입니다.”
오늘도 먹잇감을 찾아 최대한 눈은 가늘게, 목은 길게 빼어 모니터로 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