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제로미터?
‘오늘도 우리 사장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광고)주님,
제한된 연봉과 주어진 업무시간 이외
업무는 지양해도 된다는 회사 의견을 적극 수용하게 해 주옵시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업무의 늪에서 구하옵소서’
‘흠.. 이게 아닌가..?’
‘바흐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크나큰 지혜로 초과 업무는 부당함을 깨닫게 해 주십사, 열반에 이르게 하여...’
시계가 5시 50분을 가리킨다.
슬슬 정리하고 5시 55분에 튀어 나가야 한다. 100미터 달리기 23초.
요란하지만 제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발구르기 실력.
하지만, 복불복 타인과 과도한 밀착 스킨십을 피하려면 6시 4분 지하철을 타야 하기에 조금도 지체할 수 없다. 성공했다면, 다음 정거장에서 더 몰아치기 전에, 핸드폰 확인할 공간을 미리 확보한다. 정신없이 달리는 사이 쏟아져 있던 카톡과 문자에 답을 하고,
곡소리가 절로 나올 즈음 하차한다.
벤자민버튼과 동일재질인 주님의 시간은 항상 나와 거꾸로 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다급히 업무 승인이 필요한 날엔 휴가를 가거나, 조기퇴근을 하고.
내가 퇴근한 이후에는 쉼 없이 업무 요청을 하고.
내 귀에 도청 장치를 달아두지 않고서야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지하철 업무 처리가 완료되면, 그제야 주님은 무늬뿐인 걱정스러운 안부를 전한다.
“퇴근하신 거 아니에요?”
야근 수당에 예민한 회사는, 퇴근을 독려하고 법정 근로시간을 보장해 주었으나 회사 밖 업무 처리에 있어서는 입꾹, 귀꾹의 일관된 자세를 취했고,
광고기획 ‘AE’라는 멋진 타이틀은 사전적 의미 ‘Account Executive’가 아니라
‘Anytime, Everything’의 이면적 의미를 숨기고 있었다.
퇴근과 동시에 수신 차단하면 된다는 조언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업무 담당자는 나이고, 일이 꼬이거나 미뤄지면 손해 보는 것 또한 결국 나니까.
또한 주님의 은혜를 받는 사장님은 담당자의 사정보다 주님의 사정에 민감하시니까.
결국 지하철 하차와 동시에 좀비로 재탄생한 나는, 학원이 끝나는 시간 엄마가 데리러 오길 바라는 비글 자매를 위해 흐트러진 매무새를 대충 정리해 본다. 양쪽에 고사리손 손을 하나씩 잡고 비글 자매에 이끌려 집에 돌아가면 날것 그대로인 거실을 정리하고 저녁 밥상을 준비한다.
배고픔에 못 이겨 간식이 비글 자매 입에 들어가기 전, 최대한 빠르게 끝내야만 한다. 다음으로,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네 것 맞는 숙제를 봐주고, 아이들이 깨끗하게 씻었는지, 잠자리에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면 긴 하루가 마무리되어 간다.
직장인도 엄마도 아닌 좀비 완전체가 되어 겨우 돌리는 한숨에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사나’ 싶다가도 자아정체성을 찾아 헤매던 이전의 시절보단 낫다고 위로해 본다.
‘주부 또는 엄마’라는 이름 아래 의무화 된 반복 노동, 상처뿐인 영광, ‘나’라는 존재의 불안정한 미래.
지친 몸보다 한없이 추락하는 자존감에 더 고통스러웠던 나날들.
언젠가 어느 연예인이 방송에 나와 본인의 힘든 시기를 언급하며 힘들 때 우는 건 삼류, 참는 건 이류, 웃는 건 일류라고 했다. 그때의 나는 분하면서도 스스로 삼류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지금은 좀비의 형상이긴 하나,
제자리를 찾아가는 자존감 덕에 참을 줄 아는 이류 좀비가 되었으니, 그래도 이 얼마나 희망적인가.
적지 않은, 아니 오히려 새로 시작하기엔 많은 나이지만, 내재된 가능성이 있음에 안도하고, 나를 찾는 어른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끼려는 그 중요한 순간에, 감상을 깨는 ‘카톡’ 알림이 울리고야 말았다.
‘대리님, 퇴근... 하셨죠..?’
웃음이 난다. 일류 좀비로 승급이다.
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