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복수를 꿈꾸다... '강복순'
-삐삐삐빅~삐~삐~삐~
-삐삐삐빅~삐리릭
회식하고 온다던 남편이 현관 비밀번호를 한방에 누르지 못하는 걸 보니 술이 똥이 되게 마신 게 분명하다. 일어날까 말까 고민에 빠진 사이 현관문이 열림과 동시에 ‘철컥’ 현관 옆 화장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하... 또...’
남편에겐 치명적인 주사가 하나 있다.
과하게 술을 마신 날이면 꼭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모든 옷을 다 벗은 채 욕조에 들어간다. 터미네이터가 지구에 처음 왔을 그 복장 그대로, 그 자세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싸대기를 맞는다. 그럼 나는 젓가락 하나를 챙겨 문을 따고 들어간 다음, 반가움을 알리는 포효를 하고 그의 등짝에 손바닥 인장을 남기며 지구식 환영 인사를 한다.
남편에게 인간으로 살 수 있는 백만 스무 번째 기회를 주기 위해 거실로 끌고 나오면서 잊지 않고 다짐한다.
‘나도 회사만 가봐라, 우 씨...!’
남편은 이상적인 회사생활을 꿈꾸게 만드는 나의 롤모델이다.
업무의 연장인 회식을 1차만 끝내고 집에 가는 눈치 없는 인간 따위는 되어선 안 되며,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정도는 마셔 줘야 ‘아 저 친구, 반듯하구나’란 평판을 들을 수 있다. 또 업무에 완벽을 꾀하기 위해 회사 정문을 들어선 순간, 사적인 연락은 칼같이 차단하며,
불철주야 회사의, 회사에 의한, 회사를 위한 직원이 되어야 한다.
연애 시절 ‘한때 내가 좋아했던 오빠’는 1순위가 ‘나’ 임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프면 야근 대신 죽과 약을 사서 부랴부랴 달려왔으며, 만나지 못하는 날이면 지쳐 잠들 때까지 전화로 사랑을 속삭였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오빠는 결혼과 동시에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곁에 남은 건, 내가 2호를 제왕절개로 출산하고 무통 버튼을 엄지에 쥐 내릴 정도로 누르는 와중에도 보호자 침대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는 워커홀릭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10년간 복수를 꿈꿨다. 올드보이 최민식의 군만두가 나에겐 곧, 남편의 행태와 행적과 같았기에 마음에 품고, 머리로 기억하며 곱씹었다.
‘그와 똑같은 회사원이 되자.
일은 美치게, 회식은 味치게.’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닿았는지 드디어 무시무시하다는 광고회사에 입성했다.
야근과 회식으로 점철된 마성의 그곳.
경단녀를 끊고 사회에 발을 다시 내딛게 되면서 남편은 최대한 서포트를 해주겠노라 약속했다.
이제 나는 그가 했던 그대로 회사 핑계를 대며 워커홀릭인척, 집안일과 육아를 떠미는 일만 남게 된 것이다. 짜릿한 희열마저 느껴졌다.
입사 첫날, 팀장님이 O.T 겸 차 한잔을 하자며 회의실로 불렀다.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각오해야 할 거라고 일러주시려나 보다. 암요, 암요. 준비되어 있습니다.’
“강대리, 우리 팀은 야근은 웬만해선 지양하고 있고, 바쁜 주간 빼고는 보통 10분 일찍 퇴근해.”
‘젠장...’
계획이 약간 틀어지긴 했지만,
‘그래... 야근은 뭐.. 오히려 체력 안배를 위해 많은 것보다 적은 게 낫겠지.’
그렇게 위안 아닌 위안인 면담을 끝내고 나오니 단톡방에 그날의 회식 장소가 공유되어 있었다.
‘야근은 아니라도 회식만큼은 거하게 놀아 보면..... 복... 수... 를... 할.. 수......... 응..? 파스타...?’
그렇다. 퇴근이 중요한 팀인 만큼
회식마저도 점심 식사로 대신했고, 그때마다 주로 정통 이태리식 파스타집을 간다고 했다.
결국 거한 점심을 먹은 그날 저녁,
남편보다 더 일찍 도착한 집에서!!!
뽀로로 탬버린으로 숱하게 갈고닦은 신들린 실력을, 시큰둥해 마지않는 비글 자매 앞에서 또다시 흔들어 젖혀야 했다.
복수를 엄포하고 당당히 출근했던 내가 맺힌 한을 쏟아내는 듯한 춤사위를 벌이자 남편은 안쓰러웠던지 위로의 말을 끊임없이 건넸다. 실룩실룩 올라가는 입꼬리는 숨기지 못한 채.
“내가 앞으로는 일도 줄이고 와이프 사회생활을 위해 외조할게~”
입술에 바른 흥건한 침만큼 말뿐인 다짐인 걸 알지만, 당장은 대안이 없으니 속아 넘어가는 척해야 할 것 같다. 게다가 나의 널뛰는 감정 기복을 받아주는 유일무이한 존재이니 회사생활의 고충 창구로 쓸모도 있을듯하고.
아무튼! 복수는 잠시 보류해야겠다.
짜다 못해 쓴 연봉이 달달해질 때, 받은 만큼 일하는 것이 도의인 그날이 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