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입장하세요!
4세가 될 때까지 엄마, 아빠, 물 등 극히 소수의 단어만 사용했던 1호였다. 말이 늦어질수록 초조해지는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고, 제발 문장이 쏟아지길 간절히 빌었다. 어찌나 간절한 바람이었던지 고학년이 된 1호는 스스로 성대결절을 의심할 정도로 수다쟁이가 됐고, 특히 엄마가 부재한 순간에는 전화와 문자로까지 대신했다.
“오늘은 엄마 전화 못 받으니까 꼭 아빠한테 전화해~ 알았지?”
“응~”
찰떡같은 대답에도 하교와 동시에 리셋되는 1호의 뇌는 자연스레 엄마의 번호로 전화를 하게끔 손가락에 명령을 내렸다.
존재한 곳이 곧 우선순위인 까닭에 회사에 있다 보면 때때로 비글자매와 소통이 매끄럽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까다롭기로 소문난 광고주와 미팅이 잡힌 날은 예외였다.
“나 오늘 진짜 전화 못 받아. 근데 안 받으면 애들 계속 전화할 거고, 혹시라도 무슨 일 있어서 전화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오빠가 꼭 미리 애들한테 전화해!!!”
“응!”
1호와 마찬가지로 찰떡같은 대답이 심히 의심스러운 남편이었지만 다른 방안이 없었다.
미팅이 한창이던 그때, 헬스장의 덜덜이가 마치 왼쪽 손목에 올려진 양, 손 마디마디 깊은 곳까지 울림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핸드폰은 무음 처리로 해두고 워치는 깜박한 게 문제였다.
결국, 1호도 남편도 찰떡같은 대답을 개떡으로 응한 것이다.
외조하겠다던 남편은 말뿐인 외상으로 늘 대신했고, 예전과 마찬가지로 회사 지박령으로 살고 있었다. 지박령을 물리칠 굿이 필요할 때가 다가옴을 심각한 미팅의 순간에도 직감적으로 느꼈다.
릴레이 회의에 도돌이표 결말로 영혼의 씨앗까지 탈탈 털리고, 남은 육신마저 넝마가 되어 오른 퇴근길에서 핸드폰 까톡 울림이 들렸다.
[오늘 늦을 것 같아... 미안해...]
[오늘‘도’ 겠지!!!]
강 차장은 퇴근했지만 엄마 본연의 업무로 출근한 나는 마리오네트가 되어 영혼 없는 기계적인 움직임의 연속을 이어갔다. 워킹맘이 되고 찾은 자존감이, 그리고 늦깎이 워킹맘으로서 불타오른 의지가 무너진
체력 앞에 장사 없는 형국이었다. 천녀유혼의 나무 요괴가 앗아간 듯한 나의 혼령을 달래며 겨우 하루를 마무리하고 비글자매와 잠자리 인사를 하는데...
-삐비빅-
지박령이 우리 집에 왔다.
걸신까지 붙었는지 허하다며 냉장고를 거덜내기 시작하니 잠자리에 들려다 만 비글자매는 다음날 등교도 잊은 채, 재밌는 구경에 흠뻑 빠졌다.
드디어 때가 왔다.
이 구역 미친년을 접신하고, 신명 나게 굿판을 벌여야 할 그때가.
지박령인 남편에게는 야근 적립 도장이 있다. 다 채울 때마다 1회 야근 무료 쿠폰이 지급된다.
그가 야근 적립을 할 때마다 연년생 독박 육아로 지쳐있던 나는 온몸의 지랄 세포를 차곡차곡 적립했고, 상대가 궤멸할 때까지 자가복제와 증식을 반복했다.
그렇게 30대에는 치열하게 싸웠다. 서로에게 상처를 숱하게 줬고, 패배는 곧 죽음과도 같았다.
하지만, 40대에는 치열하려니 체력이 안 되고, 상처 주려니 어휘력이 떨어지고, 승자와 패배를 가리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눈 옆에 점을 찍고 달라지기로 마음먹었다. (점이라기보다 기미라고 말하는 게 맞지만.) 아무튼 달라진 외모만큼 달라진 마음가짐으로 승리를 위해, 글로리 한 영광의 순간을 위해.
시간이 흘러 PC off제도를 모두가 충실히 이행하는 동안에도 남편 홀로 야근 적립과 무료쿠폰을 반복하면, 나 역시 그의 카드 포인트 적립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카드포인트만으로도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도록, 그가 야근에 지쳐갈 때쯤 흥을 돋울 문자 알림을 날려준다.
회사의 꺼지지 않는 PC를 보유한 그의 한 달 카드값이 청구된 날,
그가 한마디 한다.
“우리 카드값 얼마 나왔는지 알아?”
그의 꺼지지 않는 PC에 숨결을 불어넣으며 나는 그의 티키타카에 응한다.
“퀴즈야? 맞히면 상품 있어?”
그가 두툼한 뱃살아래와 엉치뼈 근처 허리인 듯 아닌 듯 애매한 경계의 그곳에 두 손을 올려두고 한숨을 쉬면, 나는 이 구역 미친년을 접신하기 위해 눈알을 뒤집고 흰자위가 최대한 노출될 수 있게 한다. 입은 최대한 신난다는 듯이 웃으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남편은 한동안 가정에 충실한 가장이 되었고, 결국 내가 쓴 카드값이 될 나비효과를 깨달은 나 역시 먼지 쌓인 가계부를 꺼내 본다. 얼마간은 평화롭겠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는 로드 FC의 선수들이며, 끝내는 트로피를 차지하고 말 거다. 그 주인공이 내가 되길 빌며, 트로피 가득 위스키를 부어 축배를 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