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대화합의 장
연년생 출산 소식을 들은 육아 동지들은 차마 축하한다는 말을 내게 건네지 못했다. 그저 안타까움이 섞인 탄식과 함께 무사안일을 빌어줄 뿐...
“그래도... 자매니까... 나중에는 인형 놀이도 하고, 둘이 잘 놀 거야... 힘내...”
너나 할 것 없이 눈 밑 다크 서클 문신을 한 동지들의 위로였지만, 오직 그 말뿐이 당시를 버틸 주문이자, 핑크빛 미래를 꿈꾸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1호와 2호의 자아가 생기고 취향이란 것이 뚜렷해지면서 나의 바람은 콩 심은 데서 팥이 나길 바라는 것과 같이 헛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공룡에 반한 1호와 공주가 롤모델인 2호는 사건의 지평선 같은 존재였다.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없는 둘로 인해 비극적 서사는 끝끝내 막에 올랐고, 비글 자매의 꼭두각시였던 나는 쉼 없이 역할을 바꿔가며 무대에 올라야 했다.
빙하 타고 엄마 찾아 내려온 둘리밖에 모르던 인생에... 중생대 공룡의 생태를 밤낮으로 연구하는 고생물학자 1호의 조수가 되어야 했다. 비글 자매의 수발로도 벅찬 하루에... 쇼핑 미미, 베이킹 미미, 캠핑 미미 등.. 도무지 쉬지 않는 2호의 절친 미미의 수족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비글들이 놀이 속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동안 나의 자아는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엄마도 쉬고 싶다고~~~~!!! 제발 너네끼리 놀라고~~~!!!!”
참다못해 발악을 하는 짐승 같은 엄마의 포효에, 비글 자매는 움찔하더니 함께 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2호의 울음으로 놀이의 끝을 알렸다.
“티라노~ 오늘 파티 갈래? 드레스 입을까? 구두는?”
“크아앙~ 슈욱~”
“티라노! 구두는 신는 거야! 발로 차면 안 돼!”
“쉬익~ 다다다다~ 퍽~”
사냥하고, 먹고, 자는 일정한 루틴 속에서 내추럴 그 자체인 티라노는 슈퍼스타급 꽉 찬 스케줄을 자랑하는 미미의 TPO(시간, 장소, 경우에 따라 달라지는 옷차림)를 이해하지 못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쥐라기 월드 이후 이번에도 공룡과 인간은 공존할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더는 반인반수로 살아갈 수 없던 나였다. 어떻게든 둘의 화합이 절실했다.
“자, 잘 들어!! 1호! 공룡이 지금 있어? 없지! 공룡이 멸망하지 않으려면 인간과 돕고 살아야 해!! 그리고 2호!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살 수 없어! 공룡을 친구로 만들어서 잘 지내야 한다고! 알겠어?! 엄마에게 다 방법이 있어!”
엄마의 현란한 말솜씨에 주눅 든 둘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파트너 제도를 도입해 쇼핑 미미에게는 쇼핑몰을 무한대로 돌아도 지치지 않을 튼튼한 두 다리의 티라노사우루스가 동행하게 했고, 캠핑 미미에게는 열매를 따고 같이 먹어 줄 키 큰 브라키오사우루스를, 베이킹 미미에게는 안킬로사우루스의 곤봉 같은 꼬리로 찰진 반죽을 돕게 했으며, 미미의 2층 집에서는 프테라노돈을 타고 다닐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서로의 파트너와 몰입하며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 노는 걸출한 성과를 내게 되었고, 스스로 ‘나는 참 현명한 어른이구나’ 생각했다.
언제나 이렇게 행복했으면 좋겠지만.
비글 자매의 생각 체계가 복잡하지 않았던 딱 그때까지만 유효했던 스킬이었다.
머리가 굵어진 지금은 이제 그마저도 쉽지 않아 졌다.
비글 자매가 동반 출전한 미술대회에서 1호는 장려상을, 2호는 입상을 하게 됐다. 학원 선생님이 건넨 통지문을 2호가 성화 봉송하듯 손에 꼭 쥔 채 뛰어오더니 숨도 가쁜 상태에서 다급히 기쁜 소식을 알렸다. 축하 인사를 전하는데 같이 들어온 1호가 보이지 않았다. 홀로 조용히 방에 들어가 울고 있는 1호를 보니 이유가 짐작됐다.
평소에도 자신의 감정보다 타인을 먼저 배려하느라 떼쓰거나 거절도 쉬이 하지 못하는 1호였다.
공룡만 알던 때와 다르게 배려심이 생기고 복잡한 생각과 다양한 감정을 갖게 되었음에도 나는 1호를 칭찬할 수가 없었다.
까다로운 작업과 까칠한 담당자인 탓에 직원들이 입 모아 계약해선 안 된다 했지만, 회사는 직원의 사정보다는 매출의 사정이 컸고 결국 거절하지 못하는 내가 그 일을 오롯이 받게 됐다.
화장실도 참고 휴무도 반납하며 담당자의 요청을 처리하던 와중에 다발성 염증으로 응급실에 가게 됐다. 하지만 사정과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는 일방적 상황에 나는 항생제 링거를 맞으면서도 일을 해야 했다.
어려서부터 줄곧 그랬던 것 같다.
집에 가고픈 맘과 달리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기다리는 것. 불편한 자리에도 거절하지 못하고 참석하는 것. 지금처럼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거절하지 못해 덥석 받고 자책하는 것. ‘난 왜 그럴까,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하는 생각이 숱하게 들고, 누구의 탓도 하지 못해 결국 스스로 자존감만 한없이 깎아내리는 일.
1호에게서 바보 같은 나의 모습이 보이자 콧잔등이 시큰하면서 울컥한 감정이 치밀었다. 여전히 고통받는 나 같은 어른이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괜스레 울고 있는 1호를 다그쳤다.
“네가 표현을 해야 알지! 너도 갖고 싶다고 말을 해야 아는 거야! 희생하는 배려는 하지 마, 누구보다 너 자신이 제일 행복해야 해.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네 마음에 귀를 먼저 기울여.”
위로와 달리 혼내는 엄마의 반응에 더 펑펑 울기 시작하는 1호 옆에서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서 있는 2호가 눈에 들어왔다. 집에 돌아오는 길, 분명 1호의 표정을 보았음에도 축하를 먼저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에 평소처럼 결과만 생각하고 달려왔을 2호였다. 과정보다 결과, 그리고 본인의 성과가 우선인 주변인들의 모습이, 순간 2호에게서 보이자, 이번에는 울컥 보다 울분이 치밀었고, 급기야 2호에게로 불똥이 튀고야 말았다.
“너도 그래! 언니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물어라도 봐야지! 다른 사람의 말, 표정, 행동에도 다 생각이 담겨 있어! 너만 칭찬받겠다고 다른 사람 기분을 무시하면 안 돼!”
결국 둘 다 울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애꿎은 아이들에게 화만 내는 ‘나는 참 못난 어른이구나’ 싶었다.
공룡과 미미가 단순히 즐기며 행복한 세상에서는 알지 못했다.
비글 자매의 현실 세계에서 나와 타인의 모습이 보일 줄은.
공룡과 미미의 허식 같은 공조로는 공존할 수 없음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내가 쌓아야 하는 내공이 타인과의 공조와 공존을 만든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