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기숙사생들만 따로 관리를 해준다. 그 관리가 시험 정답지 유출이라던가 처럼 거창한 드라마틱한 것들은 아니고, 그냥 기숙사 내에서 공부를 더 시킨다. 그리고 기숙사생이라고 하면 그냥 학교에서 선생님이 더 좋게 봐주신다. 그리고 가장 큰 단점이 있다. 학교 선생님분들께서 특강을 해준답시고, 자습시간을 빼고 강의실에 모아 기숙사생을 상대로 수업을 해주시는데, 전부 다 '이걸 들어야 해?'라는 의구심을 유발시킬 정도의 수업 수준이다. 매일 높은 수준의 인터넷 강의로 공부를 하던 내게는 이러한 선생님들의 특강이 달갑지는 못했다.(물론 학교 수업은 무진장 열심히 듣고 있다.)
오늘은 수많은 특강들 중에서 무려 교장선생님께서 기숙사생들에게 특강을 해주신다고 하였다. 6교시인 날에는 원래 기숙사 내에서 학교 끝나자마자 자습시간이 있어서 저녁시간 전까지 공부를 해야한다. 하지만 그 시간을 빼고 교장선생님이 특강을 하신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기숙사생의 반응은 모두 똑같았다.
'하.. 공부나 시킬 것이지... 시간낭비하게 하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이러한 반응을 가졌다. 누군가는 이런 우리들에게 이런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료로 시간내서 수업해주신다는데, 감사해야할 일이 아닌가?"
그 말, 나도 처음은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경험론적 관점에서 기숙사생들을 상대로 진행했던 지금까지의 모든 특강은 수준이 꽤나 상당히 저품질이었으며, 아무리 수업 수준이 낮아도 뭐하도 건지자는 마인드를 가지고 수업을 듣는 나조차 차라리 자습이나 시켜달라고 애원하고 싶어질 정도의 수업이었다.
나는 기대를 일절 하지 않고, 강의실로 향했다. 앞자리는 절대 앉아서는 안된다고 나의 직감이 알렸고, 난 내 직감의 말을 따라 뒷자리에 앉았다. 내 반의 종례가 워낙 일찍 끝나 나랑 같은 반의 기숙사 친구가 먼저 도착하였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4시의 시작 예정이었으나, 교장선생님께서 10분 지각을 하셔서 4시 10분에 특강이 시작되었다.
특강의 내용만 먼저 짧게 요약하자면,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이며, 세세함이 정상을 만든다. 모두 개인 플래너를 만들어라.
딱 이 내용을 1시간 30분 동안이나 설명했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의 교장선생님은 연설력이 꽤 높으신 편이었다. 연설문을 따로 준비하시다기보다는 전할 내용을 기억하고, 그 내용을 즉흥적으로 말로 만들어 내뱉으시며, 지루한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나는 그 당시의 교장선생님의 연설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물론 내가 지금 듣는 것은 연설이 아니라 수업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다니는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연설을 처음으로 들었던 때는 개학식날이었다. 개학식날은 정말 단순하게 반에 앉아서 교장선생님이 1교시 동안 말씀 잠깐 하시고 그대로 개학식이 끝이 났으며, 개학을 했던 날, 나머지 교시에는 정상 수업을 진행했었다. 그때의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했던 반응은.
'이건 준비를 아예 안하신 거 아니야? 어휘력은 왜 이러시지?'
그럴 때 있지 않은가. 상대방과 대화를 하는데 상대방의 어휘력이 너무 낮아서 상대방이 하나하나의 뜻을 풀어서 직접 설명을 하는데 그 마저도 채울 단어가 없어서 버벅거리며 듣는 이가 답답하다고 생각할 법한 그런 것. 딱 교장선생님이 그 느낌의 사람이었다. 정말 무능력이라고 그 당시에 느꼈다. 교장선생님의 그 당시의 말씀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면,
"어.... 뭐 신입생 여러분들.... 네..... 입학을...축하드리구요.... 그리고...어... 앞으로..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네요... 네... 이상... 즐거운 학교생활 보내도록 하세요"
딱 이런 뉘양스의 사람이었다. 글로 제대로 표현이 되었을라나 모르겠다. 교장선생님에 관한 나의 상당한 주관이 담긴 설명은 여기까지만 하고, 특강에서의 이야기를 하자면,
예상했던 대로였다. 정말로 형편없다. 어쩜 우리를 가르치시겠다고 준비한 ppt마저 형편이 없을 수가 있는지... ppt화면 넘기시는 것도 제대로 못하시고, 전하고자 하는 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의미를 분산시키는 데에 재능이 있으신 분이었다.
교장 선생님의 말씀의 패턴은 이런식이었다.
작년과 재작년 대학 입학 현황을 보여주며
"내가 왜 이 선배들의....이... 그걸 보여주었을까?생각을 해봐 애들아, 이걸 보고 느껴지는 게 없어?"
누군가가 답을 한다.
"재작년에 비해 작년은 공부를 덜한 것 같습니다."
거기에 교장선생님은
"아니...그것도 맞는데, 그거 말고, 내가 이걸 보고 느끼는 걸 느끼는 사람 없어?"
침묵이 이어진다. 몇몇 사람들은 이미 곯아떨어졌고, 집중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나는 선생님께 일종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쓸데없이 매우 열심히 들었다.
"내가 이걸 보여준 이유는, 수능 최저를...어... 선배들이 맞추지 못해서 이렇게 되었다. 이것을 보여주려는 거야~"
그 당시에 보여줬던 자료는 재작년도 대학 입학 현황, 즉 우리 학교에서 서울권 대학에 몇명이 갔는지만 적혀있는 ppt였다. 작년 버전과 재작년 버전을 보여주면서 수능 최저의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 부터, 난 심삼이 않음이 느껴졌다. 도대체 어느 누가 '서울대 1명감, 고려대는 4명정도 감' 뭐 이런 자료를 가지고 선배들이 수능 최저를 맞추지 못하여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했다. 이것을 어떻게 떠올리는가.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인지 나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고, 그 다음에 '그러니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이런 식으로, 내가 느끼기에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말을 늘어놓고 전하고자 하는 말은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그 전하고자 하는 바도, 나 같은 대학 입시를 앞둔 사람에게 특별히 도움이 될 그런 말들이 아니라 '공부는 재능이 아니라 노력이다'같은 전형적인 말들만 내려놓고, 자신이 특강을 한 것은 처음이라며 자랑스러워 하라고 말한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전형적인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 가슴으로 느끼고 있던 중이던 기숙사 학생들이었고, 그런 전형적인 말을 들을 시간에는 자습시간이나 달라는 요구를 내놓고 싶었다. 이런 욕구를 꾹꾹 참아가며 수업을 끝까지 듣고, 저녁을 먹고 기숙사 침대에 앉아서 이 글을 쓴다.
이 글의 의도는 누군가를 비난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어쩌다보니 교장선생님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을 담아버리긴 하였지만, 나의 객관적인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내보인 것이다. 공부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공부를 하는 우리에게 공부하라고 하는 말을 누가 듣고 싶겠는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공부를 할 시간을 주는 것, 혹은 공부에 관한 매우 실용적인 팁이지,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말이 아니다. 이 고등학교 기숙사에 들어온 이상 그 누구보다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모두가 미친 듯 뛰어온다. 이렇게 바쁜 우리들을 불러서 한다는 말이 고작 공부는 재능이 아니라 노력이다? 이건 개나소나 아는 사실이다. 이런 전형적인 지나가는 동네 백수 형도 할말이나 들으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가장 아까운 1시간 30분이었다.
기숙사생 입장에서는 교장선생님이 귀중한 시간을 내어서 우리를 수업해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시간을 빼앗아 특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괴롭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