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골길 May 01. 2024

침대에 눕고

혼자만의 시간 즐기기

 난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핸드폰을 이용하여 짬나는 시간마다 조금씩만 쓴다. 딱히 목적을 가지고 쓰는 것은 아니나, 오늘 통계라는 버튼을 눌러본 후에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올린 후, 나는 통계라는 버튼의 존재를 알게되었다. 내 글에 대한 조회수를 알려주는 것인가? 라는 생각에 오른손 엄지로 꾹 눌러보았더니 예상대로 내 글의 조회수 현황을 보여주었다. 글을 처음 올릴 때는 뭐 딱히 별 생각도 없고, 올리면 그냥 글이 공개되는 거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글을 쓰며 발행을 했는데, 통계라는 기능을 통해 누군가가 나의 글을 읽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기분이 너무나 묘했다. 아직은 말로 형용하지 못하겠고 나중은 되어야 제대로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글을 막 늘어놓았지만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내 글을 누군가가 읽는 다는 것이 그냥 기분이 좋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기숙사 침대에 누워있다. 우리 학교는 방과후 수업을 신청을 받아 진행을 하는데, 그 중에서 나는 수학 심화반 수업을 신청하여 오늘 그 수업을 들었다. 방과후 수업에 관한 나의 평가는 '시간이 아까웠다'로 표현할 수 있다. 수업의 구성이 주어진 시간동안 문제 몇개만 풀고 해설하는 방식이다. 사실 이는 어찌보면 전형적인 수학 공부의 방식으로 볼 수 있다. 허나 나라는 사람은 이러한 공부법을 추구하지 않을 뿐더러, 기숙사에서의 일정을 흐트러놓는 효과가 더해져 내 일과의 시간 관리와 공부에 대한 반감을 형성하는 시간이었다. 차라리 그 60분이라는 시간동안 나는 소설을 읽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타강사 정승제가 말하는 잘못된 공부법이 그 수업시간에 그대로 녹아있었다는 것을 느꼈을 때, 다음 수업 부터는 그냥 기숙사 자습실에서 책이나 읽어야 겠다는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반 담임선생님 시간에 담임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아이들아, 공부만은 굳이 할 필요 없어, 공부든 뭐든 노력이라 해라"

 이 말이 갑자기 어째서 떠오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말을 잊고 싶지 않았다. 분명 이러한 선생님의 말씀이 필요한 순간이 올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일까? 매일을 할 것이 없어 공부만 하던 나는, 분명 공부라는 것도 언젠가 벽이라는 것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박탈감이라는 벽. 박탈감은 사람이 무언가를 하기 싫게 만드는 요소는 하나일 것이다. 특히 박탈감이라는 요소는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준다. 예를 들면 모의고사를 본 후, 나보다 잘 본 친구와의 수준차이(물론 그 수준차이는 내 스스로 거부하고 싶어도 노력만으로는 따라 잡기 힘든 격차이다.)가 공부라능 행위를 힘들게 만든다. 그때에도 내가 의자에 앉아 공부할 수 있을까? 그 순간에 필요한 말이 선생님의 말씀이지 않을까,

 '공부든 뭐든 노력이나 해라'

 아마 그 순간에 내가 이 말을 떠올린다면 뭐라도 할 것이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오더라도, 나만의 템포에 맞춰서 그냥 아어나가는 게 가장 옳은 길이라고 지금은 확신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내가 미치도록 힘든 순간을 맞이하였을 때,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으면 참 다행스럽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만히 누워있다보니 이번에는 후회의 순간이 떠오른다. 내 반에는 아파서 1달정도 학교를 쉬게된 친구가 있다. 처음 그 친구에게서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얘 진짜 죽는 거 아니야?'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나만 심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의 나를 지금의 내가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 친구의 소식 때문에 미친듯이 고민에 빠졌었다. 사실 별로 친한 친구도 아니며, 내가 그리 걱정할 이유도 없고, 오히려 과도한 걱정 때문에 그 친구에게 반감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난 걱정한다라는 행위는 나쁘게 보지 않는다.

 그 친구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어찌보면 짧은 기간인 고작 1달을 빠지는 것 뿐이며, 또 누군가는 그리 대단한 질병도 아니라고 할법한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분명히 인지함에도, 그 당시의 나는 그 친구가 어떻게 느꼈을 지는 몰라도, 곧 죽을 사람처럼 대했다. 그 부분이 내겐 너무나 후회스럽다. 그저 친구를 걱정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나의 행동들이, 그 친구가 무사할 것이고 잠시 힘든 여행을 떠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이 친구는 죽을 수 있다'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행동들이었다. 그 친구는 그냥 딱히 아무생각이 아마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스스로는 친구를 그렇게 대했던 내가 너무 부끄럽다는 감정 뿐이다.

 그 친구는 뭐 들리는 소식으로는 그냥 집에서 띵까띵까 쉬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그냥 얼른 학교에 등교하기를 바랄 뿐이고, 건강했으면 좋겠다. 제 3자의 관점에서 아픈 사람을 보기란 참 힘든 것 같다. 물론 당사자 보다는 아니겠지만.

 그 친구가 학교를 쉬기 전에 반 아이들 끼리 편지를 만들기로 협의하여서, 나 또한 장문의 편지를 손글씨로 종이에 써서 그 친구에게 전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장문은 너무 오바였던 것 같다. 장문의 편지가 그랬다기 보다는, 그럴 때 있지않은가. 글을 쓰는 순간에는 '와, 완벽한 글이다'라고 생각해도 다음 날에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을 때 '내가 이딴 글을 왜 좋아했지?'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다시 고치게 되는 그런 상황. 이러한 상황을 여러번 겪음으로써 비로소 완벽에 가까운 글이 완성된다고 난 생각한다. 허나 그 글은 점검을 한번도 하지를 못하였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1차적으로 편지를 쓴 후 다음 날에 점검을 할 생각이었다. 내가 게으른 편이어서 친구가 떠나기 2일 전에 쓰기 시작해서 2일 전에 1차, 1일 전에 2차, 그 다음에 글을 줄 생각이었는데, 그 친구가 내가 들었던 것보다 하루 빨리 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후회 가득한 글을 결국 친구에게 넘기게 되었는데, 그 글을 고치지 못한 것이 내게는 한으로 남아있다.

 근데 결국에 지금 생각하면 전부 별일 아닌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그게 맞다고 나는 보고 있기는 하다.


 침대에 누워 살짝 어두운 공간에서 글을 쓰니 눈이 건조해진다. 허나 나는 인공 눈물을 가져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지금 눈이 너무 아프고 간지럽다. 나는 눈이 근시나 원시가 아니라 난시 때문에 안경 없을 때의 내 시야에서는 사물이 여러겹으로 보인다. 그리고 눈이 건조해졌을 때는 이 현상이 더 심해진다. 지금 글씨를 쓰면서도, 안경을 착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글씨가 겹쳐서 보인다. 젠장. 곧 있으면 자습 시간인데, 눈이 이 모양, 이 꼴이라니, 오늘은 이쯤에서 내 이야기를 그만해야겠다. 평소에 그냥 멍때리며 했던 생각들을 글로 써보니 감회가 새롭달까, 글쓰기에 더 빠진 느낌이다.


....자습하기 싫다.

이전 02화 변화를 원했던 주말 아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