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의 엄마에게 닥친 공황장애(소소 19개월)
나는 마흔이 되기를 고대했다. 마흔의 또다른 이름인 불혹(不惑) 때문이다. 이천여년전 공자님 말씀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건 요즘의 세상 이치에도 맞아들어가기 때문일테니. 마음의 평화, 내가 39년 동안 가져보지 못한 그것이 마흔이 됨과 동시에 기적처럼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실날 같은 희망은 대망의 마흔이 되자 먼지처럼 빠르게 흩어져버렸다. 당시 나는 육아와 직장 생활을 병행하느라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불혹은커녕 공황장애라는 혹 덩어리가 찰지게 붙어버렸다. 나는 공자에게 사기당했다고 생각했다.
처음 증상이 나타났던 날은 일도 많고 신경도 많이 쓴 날 저녁이었다. 팔이 점점 저리기 시작하더니 부위가 퍼져나갔다. 동료가 한의원에 데려다줘서 침을 맞았고 다음날 종합병원의 신경과를 찾았다. 그런데 증상을 설명하니 의사 선생님이 나에게 신경과가 아닌 정신의학과로 돌려주겠다는 이상한 소리를 했다. “몸이 저리고 마비 증상이 느껴지는 외적인 증상들인데 왜 정신과인가요?”라고 되물었지만 그의 소견은 바뀌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병원의 정신의학과는 이미 예약이 꽉 차서 한 달 후에나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여전히 정신과 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한 달 후의 날짜에 형식적으로 예약만 하고 나왔다.
그렇게 가까스로 정신과 환자가 될 위기(?)를 넘기고 나서 다시 명성 있는 지역 신경과의원을 찾았다. 거기서도 이건 정신과의 공황발작 증상으로 보인다고 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부정맥을 갖고 있음을 어필해보았다.
“혹시 심장의 문제로 이런 증상이 나타난 건 아닐까요?”
“오, 만약 심장 때문에 이 정도 증상이 나타난 것이라면 환자분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이 말에 어떻게든 정신과를 피하려는 나의 의지를 한방에 무너뜨렸다. 두 명의 신경과 전문의로부터 같은 진단을 받고 나서야 나는 정신과적 문제가 생겼다는 걸 인정했다.
조퇴하고 병원들을 찾아다니는 며칠 동안 계속 몸 상태가 나빴다. 결국 어느 날 근무시간에 공황발작이 심하게 와서 쓰러지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었고 그날로 나는 휴직하게 되었다.
처음 갔던 종합병원 정신과에 한 달 뒤 예약되어 있었지만 상황이 급해서 우선 가까운 정신과의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대기실에 나와 얼굴이 똑같은 환자가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얼굴에 유독 살이 없어서 딱 보면 삼일 굶은 사람 같은 인상을 주는데 그녀도 그랬다. 갑자기 얼굴을 가리고 싶어졌다. 이런 앙상한 얼굴이 우울하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징표 같았다. 이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쯤 진료실에서 한 환자가 나왔다. 그녀는 휴지로 얼굴을 감싸며 울고 있었다. ‘아, 역시 정신과야. 나도 저렇게 울면서 나오게 될까.’ 씁쓸한 생각을 하던 중 고개를 든 그녀를 보고 놀랐다. 그녀는 방금 정신과 진료가 아닌 보톡스 시술을 받고 나온 사람처럼 얼굴 전체가 탱탱했다. 내 얼굴이 정신병의 징표는 아니라는 증거를 찾은 것 같아 안도했다.
친절한 말투의 의사 선생님은 내게 공황발작 증세가 맞다고 하고 나선 별 말이 없었다. 그는 내가 뭔가 말을 꺼내면 그것에 대해서만 간단히 코멘트를 해줬다. 내가 1을 말하면 1만 듣고 10을 말해야 10을 듣는 타입 같았다. 마치 감기 환자가 “콧물이 납니다.”라고 말하면 바로 콧물약만 처방해주는 느낌이랄까. “그밖에 두통이나 기침은 없나요?”라고 절대 묻지 않는. 이 병원은 나와 맞지 않았다.
다음은 대학병원이었다. 한 교수님에게 진료를 받았는데 세심하고 노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만 환자가 질문하는 걸 싫어하는 듯했다. 낯선 병이니만큼 이런저런 궁금함이 있을 수도 있는데 몇 번이나 그의 표정에서 언짢음이 느껴졌다. 어쨌거나 여기서 받은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번째 진료일에도 여전히 미간이 꿈틀꿈틀하는 얼굴을 보고 나니 마음이 영 불편했다. 다른 의사를 찾고 싶었다.
마침 한 달 전에 예약해둔 종합병원의 진료일이 다가왔다. 앞의 두 선생님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인자해 보이는 의사 선생님이 앉아있었다.
“진작 오려했는데, 예약이 꽉 차서 한 달 만에 왔어요. 인기가 많으신가 봐요.”
“아니에요. 추석이었잖아요. 추석 때 환자분들이 그렇게 많이들 온답니다. 명절 스트레스가 심해서요. 저 인기는 없어요. 하하하!”
소탈한 웃음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선생님은 나의 두서없는 이야기를 따뜻하게 들어주고 날카롭게 분석해주었다. 그것이 날카롭고 따뜻한 김날따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혹시 비슷한 상황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과정을 소상히 밝혔다. 발병 후 두 달간은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고 침대에 누워서만 지냈다. 숨이 차서 전화 통화도 5분이 한계였고 식욕을 돋우는 약을 먹어야만 식사가 가능했다. 서랍에서 물건 찾기와 같은 간단한 기능들도 상실됐다. 절망감에 삼일에 하루는 울었다.
왜 공황장애가 왔을까. 산후우울증이라는 말처럼 산후공황장애도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알약을 입에 털어넣을 때마다 시체처럼 누워있던 두 달을 떠올리며 약을 먹으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현재에 감사한다. 운이 좋으면 이마저 추억이 되는 순간이 올지도. 설령 그 순간이 오지 않는다 해도 나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것이므로 괜찮다. 세상에는 수많은 엄마가 있고 그 중에 공황장애를 가진 엄마도 있을 뿐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