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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니 Oct 06. 2021

기억의 왜곡(3호 31개월)

체력이 만든 엄마 기억의 왜곡

 

 "정신력은 체력의 보호 없이는 구호 밖에 안돼" 


                                              -  드라마『미생』中 바둑선생님이 장그래에게 하는 말 

  



  토요일 오후 실내놀이터에서 3시간쯤 놀았는데 몸이 너무 나른했다. 아이와 잘 놀아줘야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빴지만 몸이 물먹은 스펀지 마냥 말을 듣지 않았다. 남편이라도 아이와 잘 놀아주기를 바랐지만 남편도 나른한 듯 말수가 줄었다. 중요한 시기인데 엄마, 아빠가 곁에 있는데도 아이가 유익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내내 마음이 안 좋았다.


  3호를 재우고 맞이한 자유 시간, 내 머릿속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오늘 하루 아이와의 상호작용은 '0'이야.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 그동안 못 해준 거 회복해야 하는데. 자책이 심해지다가 숨 막힐 듯한 우울감으로 변형되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빅터 프랭클의「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기 시작했다. 의지가 강한 사람들의 감동 실화를 읽고 자극을 받아 힘을 내자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의도와 달리 책을 읽을수록 내가 더 못나게 느껴졌다. 어떤 이들은 나치 수용소에서 모든 것을 잃고도 품위를 지켰는데, 나는 전 세계 어디나 있는 평범한 애 키우는 집에 있는데 숨이 막혀하다니 창피했다. 남들 다 하는 육아를 혼자 못해서 이런 의도로 이런 책을 읽고 있다는 걸 남편한테 들킬까 봐 불안했다. 급기야 공황장애 증상 중 하나인 저림 증상이 온몸으로 올라왔다. 견디다 못해 남편에게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오늘 하루는 망한 것 같아. 오늘 나는 실내놀이터에서 3호에게 제대로 상호작용을 해주지 못했어. 그런데 아빠의 목소리도 그다지 들리지 않더라고. 우리는 3호를 위해 놀이터에 갔지만 실제로는 3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어. 어떻게 생각해?”


  가만히 듣던 남편이 신중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네 말대로 오후에 실내놀이터에서 상호작용을 잘 해주진 못 한 것 같네. 그래도 거기서 3호가 방방 타고 점프하면서 많이 웃었어. 그리고 오전엔 3호가 빵집 가고 싶대서 다 같이 가서 3호가 직접 빵도 고르고 먹으면서 신나 했잖아. 그다음 마트 갔을 때에도 엄마랑 까꿍 하면서 좋아했잖아. 거기서 나와서 길가에 있는 조각품도 보고 점프도 하고 좋아했잖아. 물론 실내놀이터에서 조금 부족하긴 했어. 하지만 낮잠 안 자서 피곤한데도 짜증 안 내고 잘 놀다 잠들도록 우리가 잘 유도했잖아. 내 생각엔 오늘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


  남편의 말이 틀린 것 같지 않았다. 잊고 있었던 오늘의 좋았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3호가 웃던 모습, 좋아하던 순간. 그래, 오늘 좋았던 일들도 많았구나! 그런데 난 왜 나쁜 일, 잘못했던 일들만 기억났을까? 


  “내 생각엔 네가 체력이 달려서 생각이 부정적이 된 것 같아. 이번 주 수요일에 하루 종일 엄청 바빴잖아. 그때부터 네가 많이 힘들어진 거 아닐까?”


  슬픈 유레카를 외쳤다. 그의 말이 맞았다. 요 며칠 내 컨디션은 바닥이었다. 입술 헤르페스, 혓바늘, 근육통, 생리통, 우울감에다 잠까지 제대로 못 잤다. 생각해보니 모든 시작은 수요일에 종일 너무 꽉 찬 일정을 소화할 때부터였다. 너무 몸이 안 좋으니 모든 게 힘들게 느껴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이의 작은 증상이 크게 보이고, 작은 사건은 대박 사건으로 확대되고, 나의 부족함은 거의 공포 수준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계속 시선이 부정적인 것들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확실히 저조한 체력이 문제였다.

  2주 뒤 심리 상담 시간, 실내놀이터 사건과 기억의 왜곡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 일로 체력의 중요성 및 부족한 체력이 부정적인 사고를 증폭시킨다는 것을 신니씨가 몸소 깨달은 건 매우 가치 있는 경험이에요.”


  혼자 착각하고 혼자 우울해했던 그 어리석은 모습조차 의미 있다는 김날따 선생님의 해석에 기운이 났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이럴 때 어울리는 말 같았다. 다음에는 부정적인 사고가 나를 감쌀 때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죽음의 수용소」를 보며 육아의 위로를 얻으려 했던 자신도 안아줄 수 있기를 바래요.”


  당시 나는 선생님의 이 뒷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이해한 척 웃었다. 시간이 지나고 해가 바뀐 어느 날 폴더를 정리하다가 이 글을 다시 발견했다. 이 말을 전하던 당시 선생님의 따뜻한 표정과 제스처를 보아 분명 중요하고도 좋은 말임에 틀림없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이해가 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조용히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야 드디어 이해했음을 알았다. 혼자 착각하고 혼자 자책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책을 붙잡고 발버둥 치던 그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조금도 한심하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그저 잘해보고자, 살고자 했던 몸부림이 온몸으로 느껴져 안쓰러움과 연민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나는 그제야 길을 잃었던 그때의 나를 꼭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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